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채권대학살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1994년 2월부터 1년 동안 기준금리를 무려 3%포인트나 올렸다. 1980년대 말 미국 부동산 가격의 급락으로 파산했던 저축대부조합 사태가 금융정책 완화로 진정된 뒤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3%이던 기준금리는 0.5%포인트씩 세 번, 0.75%포인트 한 번을 포함해 일곱 차례 기습 인상돼 6%가 됐다. 시장에 메가톤급 충격이 나타났다. 채권 가격 폭락으로 세계 최상급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큰 손실을 입고 자본금 확충을 위해 외부에 손을 벌렸다.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는 파산했다. 이 충격은 당시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기사로 다루면서 ‘채권시장 대학살(Bond Market Bloodbath)’로 불리게 됐다.

관련기사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신흥국가에서 터져나왔다. 지속된 유동성을 등에 업고 파티를 즐기던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증시가 연준의 출구 전략 1년 만에 고점 대비 50% 이상 폭락했다. 신흥국에 투자됐던 글로벌 달러 자금이 높은 금리를 찾아 미국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멕시코는 1994년에 외환위기를 겪었다. 2년 뒤인 1996~1997년에는 태국·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한국 등 아시아로 확산됐고, 1998년엔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졌다. 멕시코 금융위기가 남미·아시아 등 다른 나라로 확산된 것과 관련해 멕시코의 전통 술에 비유한 ‘데킬라 효과’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바짝 얼어붙은 세계 증시가 25~26일 열릴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만 쳐다보고 있다. 인플레이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연준이 조기 긴축에 나설 것이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금리 인상 전망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연 3회에 무게가 실렸지만 이제는 최소 4회, 최대 7회로 늘어났다. 연 7회 인상은 1994년 채권시장 대학살 때와 동일한 횟수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도 이를 우려해 신중한 금융정책을 당부했다. 코로나19로 급팽창했던 유동성 파티는 이미 끝났다. 산적한 접시를 제때 씻지 않고 미적대다가는 다시 채권 대학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오현환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