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루마니아·폴란드·독일에 총 3,000명의 병력을 배치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러시아가 3만명의 전투병력을 벨라루스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 간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조 바이든 미 행정부와 유럽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유럽행 천연가스 차단에 대비해 가스 생산국들과 함께 유럽에 가스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러시아도 에너지 무기화를 염두에 두고 중국과 다양한 가스 협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에너지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관측 속에 2일(현지 시간) 천연가스 가격이 16%나 급등하는 등 에너지 시장의 조짐도 심상치 않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 당국은 한국·일본을 비롯해 카타르·나이지리아·이집트·인도 등과 가스 생산량을 늘리는 방안을 논의한 데 이어 셰브런·엑슨모빌 등과도 관련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러시아와 밀월 관계가 깊어진 중국과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러시아가 유럽행 가스관을 잠글 경우 에너지 대란이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가스 생산국들과 전방위적 논의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인도의 국영 가스 업체 게일은 종종 미국 선적분을 유럽에 판매하는데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 절차를 더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경제적 이유로 유럽행 가스를 전면 차단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가스프롬이 유럽행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하면 하루 2억 300만~2억 2800만 달러(약 2447억~2749억 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경우 3개월간 공급이 끊기면 손실이 약 20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30%가량이 에너지 판매 수익이라는 점에서 가스 공급 차단은 쉽게 꺼낼 카드가 아니다.
다만 러시아가 이런 재정적 충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이 6000억 달러를 넘어선 데다 지난해 유가가 배럴당 평균 69달러로 러시아의 예상(배럴당 45달러)을 크게 넘어서면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JP모건체이스도 이미 가스와 원유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에 가스프롬의 총운영이익(GOP)이 지난 2019년 200억 달러에서 올해 900억 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 터프츠대의 에이미 마이어스 자페 연구교수는 온라인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러시아 지도자들은 중앙은행의 보유외환을 새로운 제재 등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럽행 가스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의 데이비드 빅터 교수는 이코노미스트에 "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부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할 것"이라며 "유럽 주요 국가 중에서는 독일이 가장 취약하다"고 말했다. 독일은 과거 동일본 대지진 이후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면서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급등했다.
이런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대(對)중국 공급량 늘리기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유럽행 수출을 중단하는 대신 중국 수출을 늘려 수익을 보장하면서도 서방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이날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외교 담당 보좌관은 "가스 분야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많은 협정을 준비하고 있다"며 "(푸틴 대통령의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중국) 방문은 가스 협력 발전에 또 다른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