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칩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 재개를 선언한 인텔이 생태계 확장을 위해 1조원(10억 달러)을 투입한다. 회사가 보유한 기술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미래 패키징 기술, 파운드리 외연 확장을 위한 차세대 칩 설계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체 칩 생산을 넘어 앞으로 맞이할 파운드리 손님들의 다양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굴지의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파운드리 서비스를 출범한 점도 눈에 띈다. 비슷한 모델을 가진 삼성전자와 TSMC가 인텔의 매서운 진입에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지도 향후 관전 포인트다.
인텔은 7일(현지시간) 10억달러(약 1조원) 규모 파운드리 펀드를 출범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펀드는 인텔의 파운드리 조직 '인텔파운드리서비스(IFS)와 사내에서 각종 투자 전략을 짜는 인텔 캐피털이 협력해 만들었다.
인텔은 파운드리 공정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 확보를 위해 펀드를 운용한다. 인텔 파운드리를 찾은 손님들이 원하는 칩을 문제 없이 생산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게 골자다.
특히 인텔은 반도체 시장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패키징' 기술 투자를 강조했다. 최근 파운드리 업계에서는 공정 미세화 한계로 서로 다른 칩을 이어 붙이거나 수직으로 쌓는 차세대 패키징 기술이 대세다. 향후 패키징 시장이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인텔은 주력인 중앙처리장치(CPU)를 수십 년 간 생산해오며 첨단 패키징 노하우를 축적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자사 패키징 기술과 시너지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차세대 패키징 선점을 위해 투자를 집행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칩 설계를 위한 차세대 명령어집합구조(ISA)인 '리스크-파이브(RISC-V)'에도 중점 투자할 계획이다. ISA는 칩 설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인텔 고유의 아키텍처인 X86과 함께 고객사가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으로 풀이된다. 팻 겔싱어 인텔 CEO은 펀드 출범에 대해 "인텔은 혁신적인 칩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을 위해 도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인텔은 이날 발표에서 파운드리 서비스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IFS 엑셀러레이터’라는 프로그램도 출범했다. 케이던스, 시놉시스 등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EDA) 툴 회사를 인텔 파운드리 생태계로 끌어들여 고객사가 수월하게 칩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인텔은 이번 발표 이후 구체적인 펀드 운용 방안을 3월 말 발표할 계획이다. 하반기에는 ‘파운드리 데이’를 개최해 고객사와 대중에게 인텔의 전략을 설명할 예정이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 재개 발표 이후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생태계 조성 발표도 거침 없는 파운드리 인프라 구축 전략의 일환이다.
지난해 초 인텔은 세계 시장의 칩 인프라 불균형을 지적하며 ‘파운드리 카드’를 내세워 미국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선봉장을 자처했다. 이 발표 이후 인텔의 파운드리 투자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지난해 애리조나 팹 2기, 올해 오하이오 주 팹 2기에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각 부지마다 20조원을 쏟아붓는다. 이미 퀄컴, 아마존 등과 파운드리 생산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고도 전한 바 있다. 또 아일랜드 기지 내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들이는 등 유럽 파운드리 손님들을 유혹하기 위한 작업에도 한창이다.
대규모 파운드리 설비 투자에 이어 소프트웨어 생태계 조성까지 나서며 시장 진입에 고삐를 죄자, 기존 파운드리 업계의 긴장감이 올라가고 있다. 1조원이라는 대규모 자원 투입과 함께, 자사 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고객사의 호감도를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파운드리 양대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파운드리 업계 1위 대만 TSMC 역시 고객사를 위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SAFE'라는 파운드리 프로그램으로 고객사를 지원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여러 공식 석상에서 첨단 패키징 기술과 설계(EDA) 툴 및 설계자산(IP)을 확보해 고객사를 지원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고객사 칩 설계를 지원할 파트너 회사인 '디자인 솔루션 파트너(DSP)'도 다수 확보하고 있다.
TSMC도 'VCA'라는 이름 아래 고객사의 칩 설계를 지원하는 파트너사들을 두고 있다. 또 고성능 칩을 원하는 고객사를 위해 3D 패키징 분야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칩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텔이 기존 시장 생태계에 균열을 가하면서, 파운드리 회사들 간 고객사 확보를 위한 생태계 확보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최근 파운드리 인력 채용이나 투자 면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분위기"라며 "특히 파운드리 분야에서 인텔이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로 한 패키징 분야가 승부처로 떠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