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현직 대통령과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가 정면충돌하는 초유의 사태에 정치권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임기 말 4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한복판에 뛰어든 것 자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간접 지원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정권 교체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대립이 진영 대 진영 구도를 굳혀 오히려 정권 교체 프레임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가뜩이나 혼전을 거듭하는 20대 대선이 문 대통령의 ‘격노’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문 대통령이 10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을 통해 공개한 메시지는 윤 후보를 향해 “강력한 분노”라고까지 언급해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 문 대통령은 참모회의에서 메시지 공개를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분노를 여과 없이 표현한 것에는 ‘현 정권을 범죄 집단으로 규정한 윤 후보가 먼저 선을 넘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이날 윤 후보가 인터뷰에서 ‘집권 시 전(前) 정권 적폐 청산 수사를 할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선거 전략이라면 저열하고 소신이라면 위험하다”고 직격탄도 날렸다.
그동안 현안에 말을 아껴온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자 여권은 기다렸다는 듯 당의 거의 모든 스피커를 동원해 공세를 퍼부었다.
이 후보가 문 대통령의 발언을 엄호하듯 윤 후보 비판에 먼저 나섰다. 이 후보는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을 찾아 정책 협약식을 마친 뒤 취재진을 만나 “많은 대선 과정을 지켜봤지만 후보가 정치 보복을 사실상 공언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며 “보복이 아니라 통합의 길로 가시길 참으로 진심으로 권유드린다”고 했다. 이 후보는 이후 페이스북을 통해 “위기 극복, 경제 회복에 주력해야 할 때”라며 “국민들께 사과하시기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현 정부의 청와대 인사인 고민정·김의겸·최강욱 등 민주당 의원 20명도 가세했다. 이들 의원은 긴급 성명을 통해 “대선 승리로 문 대통령을 반드시 지키겠다”며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하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사과 요구에 대해 국민의힘은 “선거 개입”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양수 선대본부 수석대변인은 이날 구두 논평에서 “문 대통령이 적폐 수사 원칙을 밝힌 윤 후보를 향해 사과를 요구한 것은 부당한 선거 개입으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청와대와 여권의 전방위 공세가 대선판을 흔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 후보가 문 대통령의 지지율도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후보를 찍는 것이 문 대통령을 지키는 일’이라는 지지층 결집을 노린 전략적 행보로도 해석됐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문 대통령의 발언은 현 정부의 핵심 지지층인 ‘화이트칼라와 40대·호남’을 묶고 친문 결집을 통해 대선에 최대변수가 될 것”이라며 “윤 후보의 발언에 대해 문 대통령이 묵묵부답을 유지했다면 당의 불만이 커질 수도 있었다. 이 후보가 지지율 정체를 겪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지지층 결집의 강도만 커질 뿐 확장력이 생길지는 미지수라는 분석도 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친노·친문의 결집 강도가 높아질 수 있다”면서도 “본래 지지층의 지지 강도가 6에서 9가 된다고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어서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정권 교체 구도만 강화된다는 평가도 나왔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윤 후보의 ‘적폐 수사’ 발언은 대단히 전략적으로 읽힌다”며 “청와대와 여권이 윤 후보의 전략에 빠져들어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현직 대통령과 야당 후보의 대립 중에 윤 후보가 통 큰 정치로 맞받을 경우 정권 교체 구도만 강화해 중도층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윤 후보는 재경 전북도민 신년 인사회에 참석한 뒤 ‘문 대통령이 사과를 요구했다’는 취재진의 질문에 “저 윤석열 사전에 정치 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심지어 윤 후보는 “우리 문 대통령께서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해오셨다”며 “문 대통령과 저는 똑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문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강경 일변도였던 여권의 힘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