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공포가 현실화하면서 글로벌 증시가 혼돈에 빠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사실상 전면전을 선포하자 국내 증시는 외국인의 매도세가 거세지면서 하루에만 68조 원의 시가총액이 증발하고 52주 신저가를 새로 쓴 기업들만 170여 곳에 달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개전 가능성이 뚜렷해진 만큼 당분간 변동성 장세가 이어질 수 있으며 코스피의 추가 하락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인 ‘러시아 대 서방국가’의 전면전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추가 낙폭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코스피·코스닥 한 달 만에 최저치…시총 70조 증발=2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70.73포인트(2.60%) 내린 2648.80에 거래를 마쳤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증시에서 처음 부각됐던 지난 15일(종가 2676.54) 이후 간신히 2700선을 지켜왔던 코스피는 이날 하루 만에 3% 가까이 빠지며 2650선 아래로 추락했다. 타격이 더 컸던 코스닥지수는 전일 대비 29.12포인트(3.32%) 하락한 848.21에 장을 마감했다.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1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긴축 발언 충격에 급락했던 지난달 27일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이날 코스피는 외국인·기관의 매도세에 시총 상위 종목들이 큰 폭으로 추락했다. 시총 상위 10위권의 주식이 일제히 하락했는데 특히 국제 유가가 8년 만에 100달러를 돌파하면서 화학주의 낙폭이 컸다. LG에너지솔루션이 전일 대비 5.77% 하락해 5조 4000억 원의 시총이 단숨에 날아갔고 LG화학도 6.79% 내린 채 마감해 2조 5000억 원이 증발했다. 삼성전자(-2.05%)와 SK하이닉스(-4.67%) 등 반도체주도 네온 등 가스류의 공급 차질이 우려되며 각각 하루 만에 8조 4000억 원, 4조 원의 시총이 사라졌다. 또 기아는 전일보다 5.90% 내려 52주 신저가를 새로 썼는데 코스피에서 이날 52주 신저가를 경신한 종목이 41곳에 이른다. 코스닥에서도 대부분의 기업이 큰 폭으로 하락하며 130개 기업이 52주 신저가를 새로 썼다.
◇외국인 투심 크게 위축…5일 연속 1.5조 팔아=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충돌이 가시화하며 외국인 자금이 국내 증시를 이탈하고 있는 것이 지수 급락의 주된 원인으로 지적된다. 외국인투자가들은 우크라이나발 긴장감이 고조되던 18일부터 이날까지 코스피에서만 1조 5017억 원을 순매도하며 5거래일 연속 매도 행진을 이어갔다. 특히 이날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이 구체화되면서 증시 등 위험자산에 대한 회피 심리가 빠르게 확산됐다. 유승창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대외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환경임에 따라 한국 증시뿐 아니라 ‘글로벌 주식시장 전반’에서 자금이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며 “우크라이나 사태뿐 아니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이슈까지 일단락돼야 외국인 자금의 매도세가 멈출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더해 러시아에 대한 서방국가의 경제적 제재 강화가 가시화되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는 점도 원인으로 지적했다. 정명지 삼성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도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금리 인상 압박 등으로 미국의 나스닥 등 주요 증시가 조정을 받고 있었다”며 “즉 현재 증시(위험자산)의 본질적 위협은 인플레이션인 셈인데 우크라이나 사태가 러시아 경제제재 등을 동반한 국지전 형태로 이어진다면 인플레이션이 더 자극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 금리 인상까지 스케줄대로 진행된다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위축+고물가) 양상으로 넘어갈 수 있어 증시 위험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투매보다 관망…추가 낙폭 제한적일 것”=이날 코스피를 비롯한 아시아 증시들이 2%대 급락세로 장을 마친 데 이어 유럽 증시 역시 장 초반에 2~3%대 내림세를 기록했다. 특히 러시아 증시는 장중 50%나 폭락했다가 하락 폭을 줄이는 등 엄청난 변동성을 나타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재정 부담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시장이 예측하는 대로 동부의 친러시아 지역 일부만 가져가는 형태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다만 워낙 불확실성 요인이 크다 보니 변동성은 상당 기간 유지될 것 같고, 최소 일주일 정도 후 우크라이나 사태가 안정화되고 나서야 시장도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변동성이 일시적·단기적일 것이라는 해석 아래 코스피의 추가 낙폭도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체로 우세하다. 김형렬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불편한 투자 환경이 계속되는 것은 맞지만 수출이나 경제가 마이너스인 상황은 아니다”라며 “미국 나스닥 등 유독 먼저 앞서갔던 자산 및 금융시장의 조정이 있는 것일 뿐 국내 증시의 레벨 다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서정훈 삼성증권 연구원 역시 “국내 증시는 밸류에이션 부담이 현저히 낮은 관계로 추가적인 낙폭과 조정의 기간은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며 “최근 글로벌 전반에서 오미크론 확산세가 진정되면서 리오프닝 기류가 강화되고 있는 점도 지수 하방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변동성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수 있으며 코스피지수 하단을 2500선까지는 열어놓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경민 대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여느 때보다 변동성에 대한 경계 심리를 높여야 하며 코스피가 2500선까지 밀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산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려는 전면전 양상이 벌어질 경우 코스피는 현재 대비 6% 이상 하락한 2470선까지 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