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안보 측면에서 경제와 산업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글로벌 경제나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전쟁 발발 전에 미국 등 각국이 저지에 나섰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의 위협에 상시 노출된 우리나라 역시 ‘천궁’ ‘현무’ 등 첨단 무기와 함께 압도적인 반도체 경쟁력이 실질적 안보를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일 외신과 산업계 등에 따르면 미국은 대(對)러시아 제재 강도를 높이며 반도체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제품의 러시아 반입을 막는 조처로 주요 반도체 기술이 대부분 미국에서 개발된 만큼 사실상 러시아가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TV부터 무기까지 현대의 모든 생산품에 들어가며, 특히 첨단 기술과 밀접하다. 러시아 산업 전반을 무너뜨릴 만한 가공할 위력의 이 제재 수단은 앞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때도 유용했다.
같은 맥락에서 반도체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국력에 비례한다.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TSMC가 대표적 사례다. 미국 빅테크 기업이 설계한 첨단 반도체를 도맡아 생산하는 TSMC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연결 고리다. 대만은 코앞의 적대국인 중국에 군사력에서 한참 밀리지만 TSMC를 매개로 세계 최강 미국의 엄호를 받고 있다. 이른바 실리콘실드(반도체 방패)다. 최근 일본이 반도체 등 전략물자 관리를 맡는 경제안보실을 신설한 것도 안보의 실마리를 반도체에서 찾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우리 역시 굳건한 실리콘실드를 갖춰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세계 1위에 오른 메모리 반도체는 ‘초격차’로 경쟁력을 이어가고 시스템 반도체 역시 TSMC에 견줄 만큼 실력을 쌓도록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반도체 기술 패권은 곧 안보와 직결된다”며 “우리도 우크라이나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주변국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도록 반도체 부문에 대한 재정 지원과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