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국경을 뛰어넘는 편지의 마력

■ 작가

서로 본적없는 美 헬렌과 英 프랭크

책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공감으로

수십년간 우정 키운 따뜻한 이야기

손편지가 전쟁의 상처까지 보듬어





“이 세상 살아있는 사람 중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책의 속표지에 누군가가 남겨놓은 글이나 페이지 귀퉁이에 적어놓은 메모를, 저는 좋아합니다. 누군가가 이미 넘겨본 책장을 넘길 때, 동지애가 느껴지거든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람의 글은 언제나 내 마음을 끌어당겨요.” 마치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연인들의 절절한 연애편지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 글은 한 번도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향한 우정의 편지다. 뉴욕의 무명작가와 런던의 오래된 중고서적상 사이에 오간 편지로 엮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의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책이라는 매개체가 있다면, 오직 책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과 공감만 있다면. 우정은 국경만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정보가 거의 없을 때조차도 가능하다.




뉴욕에 사는 가난한 무명작가 헬렌과 런던의 중고서적 판매상 프랭크가 바다를 건너 꽃피운 우정의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코끝이 찡해진다. 희귀고서적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 헬렌은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으면서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하여 편지를 보낸다. 이렇게 단출한 사연만으로 시작했던 편지는 점점 따스한 우정의 편지로, 애틋한 공감의 편지로, 깊은 이해와 생생한 그리움의 편지로 변모하게 된다. 뉴욕의 헬렌과 런던의 프랭크 사이에 책이 있다는 것, 그들 사이에 오래된 희귀본 서적에 대한 아주 깊은 동경과 애정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서적’을 구매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편지였지만, 헬렌의 편지는 점점 간절한 우정과 그리움의 사연으로 흘러넘치게 된다. 처음에는 서점주인을 향해 보내던 편지가 점점 직원들과 가족들은 물론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동네 사람들로까지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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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의 편지는 우선 책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함을 지키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된다. 헬렌은 미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햄, 치즈나 스타킹 같은 선물들을 보내주고, 막스앤코 서점 식구들은 손으로 뜬 레이스 식탁보 같은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로 헬렌의 선물에 보답을 해준다. 당시 영국이 전쟁 직후 극심한 물자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헬렌의 선물은 단지 ‘부족한 상품’이 아니라 참혹한 전쟁을 겪은 영국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마음의 반창고가 되어준다. 이들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단지 자상한 마음과 다정한 문장만이 아니라 ‘책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다. 그는 헬렌이 간절히 원하는 책을 찾아 무려 2년이나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기까지 했다. 지성의 힘, 독서의 힘, 얼굴을 모르는 상대방의 편지 속에 숨어있는 행간의 여백까지 읽어내는 풍요로운 문해력이야말로 헬렌과 프랭크 사이에 놓인 우정의 원동력이다. 이 두 사람의 우정, 아니 한 사람과 한 마을 전체의 우정은 무려 20년간 계속된다.

사람을 사귀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에게 내가 가진 무엇을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은 것. 내가 가진 모든 지성과 감성을 동원하여, 그가 원하는 것들을 꼭 구해다주고 싶은 마음. 팬데믹 시대가 길어지면서 이런 따스한 우정의 이야기가 더욱 애틋해진다. 우리도 그들처럼 손편지를 써서 마음을 건네면 어떨까. 돈을 쓰는 선물이 아니라 마음을 온통 쏟아부어 그것이 곧 ‘나’ 자체인 선물, 거기에 내 마음이 가득 담긴 손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다면. 나는 얼마 전 멀리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책 한 보따리를 가득 포장하여 선물로 부쳤다. 책값보다 더 비싼 엄청난 배송비에 화들짝 놀랐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그리운 친구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졌다. 우리는 더 많은 다정함을, 더 깊은 따스함을, 더 짙은 우정의 언어를 꿈꿈으로써 비로소 더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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