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을 통해 북한이 위조 달러 지폐를 유통하고 불법 자금을 세탁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북한이 해외 송금에 필요한 새 루트를 물색하자 대북(對北)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여긴 러시아가 도우미로 나섰다. 자국의 스베르방크(sberbank)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해 북한의 숨통을 터준 것이다. 스베르는 러시아어로 수집·수확을 뜻한다.
스베르방크는 제정러시아 시절인 1841년 정부 소유 저축은행으로 출발했다. 공격적인 영업으로 19세기 말 러시아 내에서 4000여 개의 영업점과 200만여 명의 예금주를 확보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상업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러시아 최대 은행으로 성장했다. 2020년 기준으로 러시아 국민 중 87.1%가 이 은행의 서비스를 이용할 정도다. 스베르방크는 유로존의 재정 위기를 틈타 2011년 독일 폴크스방크, 2012년 터키 데니즈뱅크와 오스트리아 폴크스방켄인터내셔널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유럽 시장에서 덩치를 키웠다. 현재 러시아 외에도 유럽 전역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직원은 28만여 명에 이른다. 2020년 기준 자산 규모는 4980억 달러(약 603조 원), 영업이익은 235억 달러(약 28조 원)에 달한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지분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는 국영 은행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인 헤르만 그레프 전 러시아 경제개발무역부 장관이 2007년부터 행장을 맡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사회의 고강도 경제제재의 여파로 스베르방크가 유럽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유럽 내 자회사들이 급격한 현금 유출을 겪고 있고 직원 안전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러시아의 신용 등급을 투기 등급 수준으로 강등하면서 러시아의 국가 부도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위기의 늪으로 빠져드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수출 호조를 내세우며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임기 말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러시아발(發) 경제 쇼크에 대비해 정교하면서도 선제적인 비상 플랜을 마련하고 가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