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세종의 여진 정벌, 침략응징 아닌 영토확장 목적이었다고?

이규철 성신여대 교수 ‘역사비평’ 최신호에

‘세종의 정벌은 정당한 전쟁이었는가’ 게재

“여진 세력 위협은 과장되고 피해도 경미”

“400명 침입하자 1만5000명 동원해 정벌”

“유교적 명분 아닌 외교적 영향력 확대 차원”

“좋은 군주 했던 일이 모두 좋은 것 아니야”

지난해 10월 제575돌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서울 종로구 세종이야기를 찾은 어린이가 세종대왕의 업적과 훈민정음 창제 과정, 한글을 이용한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오승현 기자지난해 10월 제575돌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서울 종로구 세종이야기를 찾은 어린이가 세종대왕의 업적과 훈민정음 창제 과정, 한글을 이용한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오승현 기자




조선 시대 세종(재위1418∼1450)이 단행한 1433년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 정벌은 여진 세력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조선 초기 북방 개척을 위한 패권주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세종이 외교적 영향력 확대와 영토 확장이라는 국익 달성을 위해 출병의 명분과 원인을 외부 세력에게 전가했다는 것이다.

8일 학계에 따르면 조선시대사 연구자인 이규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2 봄’호에 이 같은 내용의 ‘세종의 정벌은 정당한 전쟁이었는가-피해자와 가해자의 전도’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세종은 대중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군주였다”며 “세종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시각이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역사 인물 세종이 아니라 ‘성군 세종’의 이미지가 고착화되었다”고 말했다.



이 현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세종대의 대외정벌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은 외부 세력의 잦은 침입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여진 세력의 위협은 실제보다 과장되었고 세종대 정벌은 유교적 명분보다는 조선의 필요에 따라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이 문죄(問罪)의 대상으로 지정했던 건주위(建州衛) 여진은 조선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증거가 계속 보고됐지만 세종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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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세종 4년인 1422년 여진이 여러 차례 조선을 공격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고 주장했다. 여진 침입 병력은 많아야 수백명에 불과해 대부분 격퇴되거나 피해도 거의 없었다. 조선 조정도 여진 침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짚었다. 그는 “당시 왜구 문제는 조선-명-일본 사이에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여진 문제는 비중있게 논의되지 않았다”며 1424년 이후 여진 세력의 조선 변경 침입은 파저강 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1434년 12월 여연 침입 사건까지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여진이 평안도 여연을 침입했을 때 병력이 4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그보다 훨씬 많은 1만5000명을 동원해 여진을 정벌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침입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넘어선 것”이라며 “조선의 대외정벌은 북방정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결론내렸다. 또 세종이 정벌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을 응징 대상으로 정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여연을 침입한 여진 세력은 홀라온 올적합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지만 세종은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침입의 사주’라는 새로운 논리까지 제시하며 이만주 정벌을 정당화했다.

이 교수는 “이만주 정벌 과정에서 세종은 명분과 행동의 정당성이 일치하지 않는 전형적 상황을 보였다”며 조선의 여진 정벌에는 주변 세력을 힘으로 제압하고 자신만의 논리로 재단한 세종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후대에 세종을 완벽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여진 정벌에서도 유교적 명분을 찾으려는 시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의 비판적 시각이다.

이 교수는 “세종과 세조의 대여진 정책은 거의 비슷하지만 사람들은 세조의 패권주의를 언급하면서 세종의 패권주의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며 “좋은 군주가 했던 일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한국사를 약자의 설명하면서 외부 세력의 찾은 침입에도 항상 참아왔던 것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있지만 한국 역사 속의 국가들도 힘을 가지고 있을 때는 주변 세력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압박했다”고 덧붙였다.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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