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러, 인도주의 통로를 지뢰밭으로…"짓밟힌 인권, 여기가 지옥"

[무차별 공격에 커지는 우크라 민간인 고통]

폭파된 다리 건너 '죽음의 탈출'

보채는 손주 달래며 '눈물의 피란'

여성들 총기 조작법 익혀 '필사의 저항'

폭격 피해 전기·수도 끊긴 지하실로

피난길에 기진맥진…거리엔 시신 즐비

"수일 내 민간인 수천명 사망" 경고도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 이르핀의 피란민들이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 사이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 지역의 전기·수도·난방이 모두 끊기면서 주민들이 필사의 피란 행렬에 나섰다. AFP연합뉴스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 이르핀의 피란민들이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 사이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 지역의 전기·수도·난방이 모두 끊기면서 주민들이 필사의 피란 행렬에 나섰다. AFP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공격 수위를 높여가면서 러시아군의 무차별 포화 속에 생존을 위협받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처참한 삶이 국제사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외신들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대대적 공격을 받는 지역의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전기가 끊긴 지하실에 숨어 지내며 공포를 견디고 있고 목숨을 건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은 힘이 빠져 길거리에 주저앉아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러시아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 전술을 본격 전개할 경우 수일 내에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영국 BBC는 러시아군 침공 12일째를 맞은 7일(현지 시간)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외곽도시 이르핀에서 목격된 민간인의 고통을 전했다. BBC는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하려는 행렬에는 인형을 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가족,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 걸음이 느린 고령자 등이 걷고 있었다”며 “이들은 도시의 멸망을 목격한다고 느끼고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이르핀의 한 주민은 BBC에 “러시아군이 민간인 주택을 폭격하고 있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라고 울부짖으며 “러시아군은 군인과 싸우는 게 아니라 아무나 보이면 싸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도 “모든 게 폭격받는다”며 “사람들이 불빛도, 전기도, 가스도, 인터넷도 없이 지하실에 앉아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폭격을 받는 도시 마리우폴에서는 수일째 전력과 수도 공급이 끊기고 위생 관리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식량과 식수도 빠르게 소진되고 있어 주민들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다고 BBC는 전했다.



피란에 나선 사람들은 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 BBC는 “폭격 때문에 생긴 건물 잔해와 같은 장애물 때문에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넘어져 다치거나 기진맥진해 길에 누운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길거리에는 시신도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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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강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인구 15만 명의 남부 소도시 멜리토폴에서는 러시아 포위군이 주둔한 건물을 향한 주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WSJ는 “우리는 비무장 민간인”이라고 외치며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한 러시아군의 발포가 이어졌다며 “유혈 사태에도 저항 분위기가 들불처럼 번져 매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민간인들이 러시아 군 차량을 맨손으로 가로막는 장면도 목격됐다.

이런 가운데 11세 우크라이나 소년이 혈혈단신으로 1200㎞ 피란길에 올라 이웃국 슬로바키아에 도착한 사연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가 장악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인근 출신의 이 소년은 어머니가 손에 들린 친지의 연락처와 여권·비닐봉지 하나를 달랑 들고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친지의 집까지 무려 1200㎞를 이동해 무사히 도착했다. 슬로바키아 내무부는 페이스북을 통해 “미소와 용기, 결의를 갖춘 이 소년은 모두의 마음을 얻었다”면서 “진정한 영웅이라 할 만하다”고 평했다.

한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이날 3차 협상에서도 민간인 탈출을 위한 ‘인도주의 통로’를 만들고 그 주변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텔레그램에 게시한 동영상에서 “인도주의 통로에 대한 합의가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고 대신 러시아의 탱크·다연장로켓포·지뢰가 그 자리에서 작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에 포위 당한 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에서 인도주의 통로로 채택된 도로에 러시아군이 지뢰를 깔았다”며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 지역에서 빠져나가는 민간인이 탑승할 버스 여러 대를 파괴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어 “러시아는 점령한 지역에 조그만 통로를 열어 수십 명에게 개방했는데 이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한 것이었다”며 러시아의 인도주의 통로 개설은 ‘보여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양측은 조만간 벨라루스에서 4차 회담을 할 예정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군이 무차별 공격의 수위를 높여감에 따라 긴급 구호나 인도주의적 정전이 성사되지 않으면 앞으로 며칠 동안 우크라이나인 수천 명이 죽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안톤 헤라시첸코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보좌관은 “의약품·생필품이 없고 난방·수도 공급 체계도 무너졌다”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 이르핀에서 우크라이 군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피란길에 나선 한 할머니를 도와주고 있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 지역의 전기·수도·난방이 모두 끊기면서 주민들이 필사의 피란 행렬에 나섰다. EPA연합뉴스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 이르핀에서 우크라이 군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피란길에 나선 한 할머니를 도와주고 있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 지역의 전기·수도·난방이 모두 끊기면서 주민들이 필사의 피란 행렬에 나섰다. EPA연합뉴스


맹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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