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간)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를 공식 발표한다는 소식에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장중 한때 전날보다 8% 급등한 배럴당 129.44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미국만이 즉각적인 수입 금지를 하고 다른 나라는 스스로 참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후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결국 WTI는 배럴당 3.6% 상승한 123.70달러에 마감했다.
이는 당장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서 하루 20만 배럴 정도의 원유를 수입한다. 수입 비중이 3%다. 전 세계에 하루 400만~500만 배럴을 수출해온 러시아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리스타드에너지의 아르템 아브라모브 셰일 리서치 담당 팀장은 “(이번 조치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영국도 러시아산 원유를 쓰지 않기로 했지만 올해 말까지 단계적으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유럽연합(EU)은 오는 12월까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을 3분의 2로 줄이고 2030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를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안은 권고에 불과하다. 블룸버그통신은 “나라별로 상황이 다르며 주요국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가격 측면에서 시장이 걱정하는 것은 러시아산 원유를 다른 곳에서 난 원유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혼란이다. 실질적 효과와 관계없이 미국이 상징적인 조치를 취했고 영국과 EU가 큰 틀에서 러시아산 사용을 줄이기로 한 상황에서 빠른 시일 내 안정적인 새 공급처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헬리마 크로프트 RBC캐피털 글로벌 상품전략 헤드는 이라크 같은 나라의 증산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라크는 아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가운데 4개국 정도가 증산 여력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200만 배럴 정도의 여력을 갖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기대할 수 있다”며 “글로벌 원유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사우디가 생산 최대치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는 가격 쇼크를 흡수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단순 계산으로 사우디의 200만 배럴에 핵 합의가 순조롭게 이뤄져 이란이 100만 배럴 이상을 추가 생산하고 베네수엘라가 하루 40만 배럴을 증산한다고 해도 러시아 물량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이 셈법에는 이들 국가의 생산 증가가 지연 등 문제없이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제프 커리 골드만삭스 원자재 리서치 글로벌 책임자는 “공급처를 바꾸는 과정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게 원유 재고인데 이것이 부족하다”며 “대체처로의 이동도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1월 석유 재고는 26억 8000만 배럴로 최근 5개년 평균보다 9% 낮다. 2014년 중순 이후 최저치다.
특히 고유가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이미 시장에 팽배하다는 점은 생산자 입장에서 추가 증산을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경기 둔화가 본격화할 경우 석유 수요도 급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소들을 고려하면 한동안 고유가가 지속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서방 제재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차질이 완만하게 이뤄지면 2분기 브렌트유 현물 가격이 145달러, 완전 봉쇄 시에는 175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에서는 200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예상도 적지 않다. 이 경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라이언 랜스 코노코필립스 최고경영자(CEO)는 “더 많은 국가가 에너지 제재에 동참하면 유가는 지금보다 더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월가에서는 사우디를 비롯해 주요국의 증산이 제때 이뤄지느냐가 향후 유가와 경기에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모나 마하얀 에드워드존스의 선임 투자전략가는 “이란 물량이 들어오고 OPEC이 증산을 한다면 경기 둔화는 되겠지만 경기 침체로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점쳤다. 반면 미 경제 방송 CNBC는 “지금의 국제 유가 급등은 매우 급격하고 갑작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며 “경기 침체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