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은 코로나19 변이 확산 속에서도 연간 1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린 기업이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팬데믹 공포가 잦아들면서 경제활동이 재개되고, 억눌렸던 수요가 살아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실적 개선이 두드러졌다. 삼성전자(005930)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업종에서 실적 개선세가 확인됐다. 금리 인상, 동학 개미 운동에 힘입은 금융사들의 약진도 돋보였다. 하지만 공급망 차질과 원자재 값 상승 등의 여파로 전기가스업 같은 일부 업종은 부진을 겪는 등 업종별로 명암이 엇갈렸다.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2월 결산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595개사의 매출액은 2299조 1181억 원으로 전년 대비 19.82%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183조 9778억 원으로 73.59% 급증했고 순이익은 156조 5693억 원으로 160.56%나 뛰었다. 모두 역대 최대 기록이다. 개별 기준(총 690사)으로도 매출 1324조 7671억 원(18.52%), 영업이익 106조 8410억 원(58.21%), 순이익 93조 8049억 원(116.13%)으로 큰 폭의 증가율을 보였다.
코스피 비중 2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실적 개선 폭은 더욱 컸다. 삼성전자를 뺀 코스피 상장사 연결 기준 실적을 보면 매출이 2019조 5133억 원으로 전년 대비 20.06%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132조 3330억 원으로 전년 69조 3483억 원의 2배 가까운 증가세(89.09%)를 보였다. 앞서 우리 경제에 착시 효과를 줄 정도로 강력했던 삼성전자의 성장 폭을 다른 상장사들이 뛰어넘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영업이익이 51조 6338억 원으로 전년 대비 43% 증가했다. 여전히 전체 상장사 이익의 39%가량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익 편중은 여전한 것으로 집계됐다.
흑자 기업 수도 증가했다. 연결 기준 595개사 중 순이익이 흑자를 낸 기업은 478개사로 전체의 80.34%를 차지했다. 이는 전년 동기(415개사) 대비 63개사(10.59%포인트)가 증가한 수치다.
김형렬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해 상반기 사회적 거리 두기로 기업의 비용 절감 효과가 컸고 하반기에는 이연됐던 투자·소비 심리가 되살아나면서 기업들의 실적 개선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조 원 이상 영업이익을 낸 코스피 상장사는 52곳으로 분석됐다. 전년(28곳)보다 85%나 늘어난 것이다. 삼성전자·현대차(005380)와 SK·포스코 등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이 대거 포함됐다. 각 그룹의 대표 기업이 선전하면서 이들과 밀접한 사업 구조를 가진 관계사들도 1조 원 클럽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자의 선전으로 삼성전기(009150)와 삼성SDI(006400)는 1조 원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현대차그룹 내 현대제철과 현대글로비스도 1조 원 명단에 올랐다. LG이노텍(011070)과 LG디스플레이(034220)도 마찬가지다. 롯데케미칼·효성티앤씨·금호석유화학 등도 1조 원 클럽에 들었다. 특히 제조업 기반의 기업들이 1조 원 클럽에 가입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들 대기업의 실적 개선이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사도 1조 원 클럽에 가입한 곳이 많았다. 금리 인상 국면에서 예대 마진(예금과 대출 금리 차에서 얻는 이익), 순이자 마진(NIM) 등이 올라 실적이 향상된 덕분이다. 지난해 동학 개미 운동에 힘입어 미래에셋증권(006800)·한국금융지주(071050)·NH투자증권(005940)·삼성증권(016360)·키움증권(039490) 등 5개사도 1조 원을 넘겼다. DB손해보험·BNK금융지주·한화생명도 포함됐다. 금융업 43개사(개별 5곳 제외)의 연결 기준 영업이익(47조 1307억 원)과 순이익(36조 2588억 원)도 각각 41.56%, 47.06% 증가해 수익성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지난해 국제 유가가 강세를 보인 덕에 화학 제품 가격이 뛰면서 화학업(351.25%)의 영업이익이 개선됐다. 철강금속업(268.63%)도 원자재 가격 급등 덕을 봤다. 운수창고 업종은 해운사들이 지난해 ‘공급망 대란’으로 인한 해운 운임 급등으로 실적이 크게 개선된 덕에 영업이익이 569.7%나 급증했다. 하지만 공급망 차질과 원자재 값 상승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이 적지 않았다. 전기가스업은 원자재인 국제 유가 상승에도 전기요금이 동결되면서 적자 전환했고, 건설업은 지난해 철근·시멘트 등 건축 자재 가격이 오르며 영업이익이 -4.34% 후퇴했다.
다만 이 같은 호실적이 올해까지 이어지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에 따른 원자재 값 상승과 글로벌 물류 대란이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김 리서치센터장은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이 같은 실적 개선을 이끌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올해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상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기업의 수익성을 판가름 낼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