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매섭게 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6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국내 경제는 우크라이나발(發) 공급망 불안으로 석유 가격이 뛰고 무역적자와 원화 약세가 동시에 덮치며 물가가 최근 10년 만에 유례 없이 오르는 상황이다. 물가가 잡히지 않을 경우 이명박(MB) 정부 식 ‘품목별 물가 관리’제도가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적자 국채 발행이 불가피한 소상공인 손실보상을 위한 제2차 추가경정예산안 규모가 조정될 수도 있다.
원일희 인수위 수석대변인은 윤 당선인이 이날 서울 종로구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에서 추경호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간사, 최상목 경제1분과 간사, 이창양 경제2분과 간사로부터 물가동향을 보고 받은 뒤 “어려운 대내외 여건 속에서도 물가를 포함한 민생 안정 대책을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라”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경제분과 간사들은 이날 윤 당선인에게 3월 소비자물가가 10년 만에 4%를 웃돈 원인과 배경, 향후 국민에 미칠 파급 효과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올 상반기뿐 아니라 하반기에도 각종 경기지표와 물가 전망이 어둡다”고 보고했다. 윤 당선인은 이 자리에서 “물가동향을 포함한 현 경제 상황을 엄중히 인식해 유류세 인하를 포함해 인수위가 현 정부에 요청한 특단의 서민 물가 안정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말부터 이날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민생을 빈틈없이 챙겨야 한다”며 경제와 관련된 주문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지난달 31일 당 소속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코로나19로 (양극화) 격차가 큰데 물가도 오르고 있다. 정권 초에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가면 민심 이반 시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물가에 신경 쓰고 있다.
윤 당선인은 앞으로 약 한 달 뒤면 취임해 국정을 책임지게 된다. 취임 이후에는 곧바로 국민의 평가를 받는다. 취임하는 5월에 물가 상승세를 낮추느냐가 윤 당선인의 경제 실력을 보여주는 가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날 ‘특단의 대책’ 마련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위기감이 반영됐다.
윤 당선인의 특별 주문을 받은 인수위가 이명박 식 ‘물가 관리’ 대책을 꺼내 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무역수지 적자와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원자재 가격이 뛰는 현재 상황은 14년 전 글로벌 거품경제의 끝단에 있었던 이명박 정부 취임 전과 유사하다. 2008년 1월 무역수지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에 육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월 특단의 대책을 요구했고 취임 후에는 52개의 생활필수품목을 지정해 ‘서민생활 안정 태스크포스(TF)’에서 관리했다. 윤 당선인이 물가가 잡히지 않을 경우 부처별로 ‘물가관리실명제’와 같은 강력한 대책을 꺼내 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과 기업들은 인수위와 물가 관리 당국인 한국은행과의 비공개 간담회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윤 당선인은 ‘50조 원 손실보상’을 내걸고 제2차 추경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출 구조 조정의 한계 탓에 일부 적자 국채의 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욱이 윤 당선인의 공약대로 현금 보상 50조 원, 금융 지원 50조 원 등 100조 원은 시중에 풀린 돈인 광의유동성(L) 6293조 원(1월 기준)의 1.5%에 달한다. 100조 원이 한꺼번에 풀리면 원화 약세를 부추겨 원자재발 물가 상승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수위와 한은이 가파른 물가 상승세를 관리하는 데 공감하면 손실보상 규모와 시기가 조절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인수위는 이날 글로벌 곡물 가격 급등으로 인한 대책 마련을 위해 급히 마련한 간담회에서 기업에 당분간 제품 가격을 올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윤 당선인의 특별 대책 주문을 받은 뒤 곧바로 민간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물가가 4%대로 올랐으니 원가가 올랐어도 제품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나왔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곡물 가격 상승으로 글로벌 인플레이션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수위는 이 자리에서 중장기적으로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해외 곡물 유통망 확보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 기초 식량 작물 비축 확대 및 위기 시 방출, 국내 생산 기반 확충의 필요성 등을 논의했다. 인수위는 추후 논의된 사항들을 국정 과제에 반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