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러 '제노사이드', 학자들도 분분…"우크라 정체성 말살" vs "증거 불충분"

바이든 '제노사이드' 발언 파장 속

실제 제노사이드 여부에 관심 쏠려

우크라이나군과 현지 경찰이 1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부차에 놓인 시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부차는 러시아군의 점령 기간 동안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고 꼽히는 키이우 교외 도시다. AFP연합뉴스우크라이나군과 현지 경찰이 1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부차에 놓인 시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부차는 러시아군의 점령 기간 동안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고 꼽히는 키이우 교외 도시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발언이 파장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행위를 제노사이드라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고 BBC가 1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제노사이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일컫는 말로 쓰이다가 1948년 유엔 총회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면서 국제법상 공식 용어로 정립됐다. 협약은 제노사이드를 국가, 민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살해 △신체적·정신적 위해 △출산 방지 △아동의 강제이주 등을 저지르는 행위로 정의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학살이 전쟁범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제노사이드는 다르다. 정의에서 볼 수 있듯 국가·민족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제노사이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당장 각국 정상들만 해도 의견이 갈린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러시아의 행위를 두고 "제노사이드로 불리기에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고 발언한 반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양국민은 형제와 같은 사이이므로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쓰는 데 주의해야 한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보였다.

한 우크라이나 남성(왼쪽)이 13일(현지 시간) 부차에서 친구 아버지의 품에 안겨 슬퍼하고 있다. 이 남성의 친구는 이르핀으로 피란을 가다가 러시아군에 의해 사살됐다. AP연합뉴스한 우크라이나 남성(왼쪽)이 13일(현지 시간) 부차에서 친구 아버지의 품에 안겨 슬퍼하고 있다. 이 남성의 친구는 이르핀으로 피란을 가다가 러시아군에 의해 사살됐다. AP연합뉴스



유진 핀켈 존스홉킨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BBC에 "러시아는 단순히 우크라이나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최근 몇 주간 러시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체성을 파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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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러시아 작가 티모페이 세르게이체프가 이달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에 기고한 칼럼을 예로 들었다. 티모페이는 칼럼에서 우크라이나를 '나치 국가'라고 일컬으며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은 재교육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청산돼야 한다. 러시아의 승리 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적어도 한 세대에 걸쳐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영리단체 '제노사이드 워치'를 운영하는 그레고리 스탠턴도 "러시아군이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목표로 (살상을) 저지르는 것은 그들이 우크라이나 민족 전체 파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나탈리야 베르보바(왼쪽)가 1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부차 공동묘지에 묻힌 남편의 묘지 앞에 서 있다. 오른쪽은 그의 아들. AP연합뉴스나탈리야 베르보바(왼쪽)가 1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부차 공동묘지에 묻힌 남편의 묘지 앞에 서 있다. 오른쪽은 그의 아들. AP연합뉴스


반면 러시아의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있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국제정치학 강사인 조너선 리더 메이너드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잔학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주 명백하지만 협약에 따른 제노사이드로 규정되기엔 아직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다만 조너선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 "다분히 유전자적인(genocidal) 사고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2월 푸틴 대통령은 개전 직전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는 독립국이라는 게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부정한 바 있다.

국제법 전문가인 필립 샌즈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교수도 국제법상 '제노사이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집단 전체 파괴 의도를 명백히 규명해야 한다며 "현 단계에서는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법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될 때가 많다"며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의 참상을 강조하기 위해 제노사이드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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