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위기 앞에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한은 역사상 처음으로 총재 없이 열린 금통위였지만 6명의 위원은 만장일치로 금리 인상에 손을 들었다. 10년 3개월 만에 최고로 치솟은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 예고 속에서 성장률에 대한 우려는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만큼 통화 당국이 절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올해 말까지 추가로 두세 번 더 올려 기준금리가 2.0~2.25%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최대 2.5%를 거론하는 전문가도 있을 만큼 한미 금리의 역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시장에 적지 않다.
성장률 접어둘 정도의 가파른 고물가
이번 인상으로 기준금리는 1.50%가 된다.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 9월과 같다. 금통위원 전원이 금리 인상에 합의한 배경에는 물가 상황이 엄중하다는 공감대가 자리한다. 이날 발표된 3월 수입물가지수는 148.80(2015=100)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2월 금통위 당일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달째 이어지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예상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는 금통위의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상영 금통위 의장 대행은 “소비자물가가 당분간 4%대의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것”이라며 “근원 인플레이션(식료품·에너지 제외)도 상당 기간 3% 내외 수준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한은 조사국은 올 2월 올해 물가 전망치를 2.0%에서 3.1%로 1.1%포인트 올려 잡았지만 다음 달 경제 전망에서도 큰 폭의 상향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된다.
미 연준이 빠른 긴축을 예고한 것도 이번 금리 인상에 영향을 줬다. 연준은 3월 정책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한 번에 0.50%포인트씩 올리는 이른바 ‘빅스텝’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단행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한은의 선제적 금리 인상으로 한미 간 금리 격차는 0.75%포인트에서 이날 1%포인트로 확대됐지만 연준이 두 번만 빅스텝을 밟아도 금리가 같아진다. 20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경기 하강 조짐 등으로 금리를 빠르게 올리기도 부담이 될 수 있는 우리 통화 당국으로서는 서둘러 리스크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 의장 대행도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과 동시에 자본 유출 압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사실”이라며 미국의 공격적 긴축 행보를 의식했음을 시사했다.
대외 변수에 추가 금리 인상 불가피
한은은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추가 금리 인상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내부 요인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주요국의 긴축 행보 등 외부 요인에 따른 물가 상승이라 통화 당국의 대응 여력도 제한적인 측면이 크다. 금통위가 이날 우리 경제의 올해 성장률로 당초의 3% 전망을 접고 2% 중후반을 제시하면서도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은 아니다”라고 강조한 대목에서 통화 당국의 고민이 엿보인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성장률을 일정 부분 훼손하더라도 남은 다섯 번의 금통위 중 세 번가량은 금리 인상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번에 0.25%포인트를 올린다고 가정하면 연말 금리는 2.0~2.25%가 된다.
일부는 미국의 공격적 긴축 행보에 가속도가 붙고 있어 우리 통화 당국도 금리를 더 올려야 한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미국의 적정 기준금리가 2.33%로 추정되는 만큼 우리 통화 당국이 미국의 금리 인상에 동조할 경우 국내 기준금리는 2.86%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변수는 역시 경기 침체 가능성이다. 최근 채권시장에서는 국채 3년물 금리가 10년물 금리를 한때 역전하는 등 경기 침체 징후가 나타나는 상황이다. 유가가 치솟으면서 3월에 이어 4월 무역수지도 적자가 예상되고 있고 자칫 하반기까지 이런 적자 행진이 이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다만 이날 금통위에서 추가 금리 인상 시기에 대한 신호는 없었다. 임시 의장 체제로 진행된 만큼 중장기적인 통화정책방향까지 언급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19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이창용 총재 후보자가 추후 운전대를 잡게 되면 내부 재정비를 거쳐 긴축 방향과 속도를 다시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