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EU)이 미국·영국의 뒤를 이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전면 중단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지만 유럽에 대한 러시아 원유 수출은 이달 들어 오히려 전월보다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산 원유를 실은 선박에 목적지를 명기하지 않거나 러시아산 원유가 50% 미만인 석유 제품을 러시아산으로 취급하지 않는 등의 편법을 동원한 결과다. 유럽의 빈약한 에너지 자립 수준을 고려할 때 전면적인 에너지 금수 조치가 러시아에는 뚜렷한 타격을 주지 못하는 반면 오히려 유럽과 세계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 시간) 수송 정보 업체 탱커트래커의 통계를 인용해 러시아에서 EU로 수출되는 원유가 3월 하루 평균 130만 배럴에서 4월 160만 배럴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원자재 정보 업체인 케이플러 역시 EU의 러시아 원유 수입이 같은 기간 하루 평균 100만 배럴에서 130만 배럴로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목적지를 특정하지 않은 채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산 원유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탱크트래커에 따르면 목적지 불명 원유는 3월 일평균 2만 4337배럴에서 이달 들어 65만 5479배럴로 한 달 사이 무려 27배나 늘었다. 유럽 원유수입사들이 ‘러시아에 전쟁 자금을 대준다’는 비판을 우려해 비밀리에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이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WSJ는 “이는 이란과 베네수엘라처럼 서방의 제재를 받는 국가들이 동원하는 전형적인 (수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목적지 불명 원유는 해상에서 다른 선박에 실린 뒤 특정 국가로 유입되는 방식으로 러시아산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산 원유가 다양한 편법으로 유럽에 유입된다는 정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블룸버그는 케이플러의 제인 셰 선임원유애널리스트를 인용해 인도의 지난달 경유 수출량이 2020년 4월 이후 약 2년 만에 가장 많았으며, 특히 유럽 수출 비중이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았다고 보도했다. 인도가 최근 러시아 원유를 대량 구매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유럽의 인도 경유 구매가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에 상충될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진단했다.
이밖에 유럽 최대 정유 업체 셸은 이달 초 러시아산 원유 비중이 50% 미만인 석유 제품은 러시아산 제품이 아니라고 보고 판매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혀 우크라이나 정부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EU는 앞서 러시아 석탄 수입 금지에 합의한 데 이어 원유 수입 중단도 검토 중이지만 이 같은 정황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유 금수 조치를 실행해도 실효성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사이먼 존슨 MIT 경제학과 교수는 WSJ에 “EU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완전히 금지한다고 해도 유조선 진입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며 “선박 대 선박으로 원유를 옮겨 거래하는 방식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EU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거부하면 유가가 상승하고 수출 가격이 올라 러시아에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주지 않을 것”이라며 “에너지 판매에 따른 러시아의 외화 수입을 실질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이후 폭락했던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22일 현재 달러당 78.96루블로 전쟁 직전 수준(2월 23일 기준 80.98루블)을 거의 회복한 데는 러시아의 원유 수출이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옐런 장관은 “유럽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EU의 원유 전면 금수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며 “원유 가격 상승은 유럽과 세계 경제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동유럽 외교관도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에 “원유 금수 조치가 러시아와 EU 어느 쪽에 더 큰 타격이 될지가 문제”라며 “러시아는 다른 나라에 원유를 팔아 결국 돈을 벌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에스크로(출금이 제한되는 특수 계좌)를 활용한 대금 결제, 러시아 석유에 대한 관세 부과 방안 등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