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예술이 된 한지…친환경 노래하다

[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개인전 연 전광영]

어릴적 조부 한약방서 영감 얻어

150여년 전 만들어진 책들 해체

대형 버섯조각 등 설치 작품 제작

오염으로 인한 생태학적 기형 비판

지속가능한 실천적 예술로 재탄생

베니스의 15세기 르네상스 건축물인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 설치된 전광영의 작품들. 병든 심장 모양 작품 주변에서 불규칙한 심장소리가 흘러나온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베니스의 15세기 르네상스 건축물인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 설치된 전광영의 작품들. 병든 심장 모양 작품 주변에서 불규칙한 심장소리가 흘러나온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




“쿵…쿵쿵…쿵…”



먼저 느껴진 것은 소리다.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서야 비로소 한지조각이 촘촘하게 박힌 대형 설치작품을 발견한다. 불규칙한 쿵쾅거림은 병든 이의 심장 소리다. 소리에 몰두할수록 자신의 심장박동이 더 또렷이 느껴진다. 우주 밖에서 날아든 운석 모양의 작품이지만 실제는 환자의 심장을 본 뜬, 우리 안에서 끄집어낸 형태다. 전광영(78)의 ‘집합(Aggregation)15-JL038’. 의사 출신이라고 자신을 밝힌 한 관객이 심각하게 물었다. “이 심장의 주인은 죽었습니까?”

한지조각으로 만든 '집합' 연작으로 유명한 작가 전광영. /사진제공=CKY스튜디오한지조각으로 만든 '집합' 연작으로 유명한 작가 전광영. /사진제공=CKY스튜디오


세계 최대 규모, 최고 권위의 미술 축제인 베니스비엔날레는 행사 기간 베니스 일대에서 열리는 수백 건의 전시 중 까다롭게 고른 30건에만 ‘병행전시(Collateral Event)’라는 특별한 이름을 허락한다. 벨기에 보고시안재단이 주최한 전광영의 개인전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ined)’이 그 중 하나다. 비엔날레가 폐막하는 11월27일까지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열린다. 한지라는 재료, 세모꼴 조각을 잇고 쌓아 구축한다는 점에서 소재주의나 형식주의로 평가되던 전 작가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지속 가능한 예술, 생태학적이며 실천적 예술로 재해석돼 주목받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기획된 전광영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이 한창인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 전경. 이탈리아의 생태주의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가 전광영의 세모꼴 한지조각에서 영감받아 지은 ‘한지하우스’가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CKY스튜디오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기획된 전광영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이 한창인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 전경. 이탈리아의 생태주의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가 전광영의 세모꼴 한지조각에서 영감받아 지은 ‘한지하우스’가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CKY스튜디오



지난 21일(현지시간) 전시 개막 행사로 열린 ‘생태학적 위기 시대의 예술과 도시환경’이란 주제의 학술포럼에서 생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환경오염이 만든 미세먼지가 유발한 병든 심장,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게 된 척박한 지표면 같은 작가적 상상력은 이대로 뒀다간 언제 닥칠지 모를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면서 “심각한 경고”라고 분석했다. 예술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오토봉 엥캉가도 발제자로 나서 환경문제로 위협받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전광영과 같은 목소리로 위기를 주장했다. 샘 바르다위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미술관 공동관장, 장 마리 갈래 퐁피두센터 메츠 수석큐레이터 등 8명의 석학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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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11월27일까지 열리는 전광영의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의 전경. 4m 높이 버섯 모양의 설치작품은 환경오염으로 유발될 기괴한 미래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11월27일까지 열리는 전광영의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의 전경. 4m 높이 버섯 모양의 설치작품은 환경오염으로 유발될 기괴한 미래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


위기의 별을 상징하는 1층 전시장 입구 설치작품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4m 높이 대형 버섯조각과 대면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학적 기형을 풍자했다. 3m 크기 병든 심장이 놓인 곳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건물인 이 집 주인장의 안방 쪽이다. 예술은 암울한 불만만 쏟아내지 않는다. 어두운 방 안쪽에서 새빨간 생명력을 빛내는 붉은 원형 설치작품은 건강하게 펄떡일 새 심장, 즉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게 한다.

이 전시는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와 마누엘라 루카다지오 프리츠커재단 디렉터가 함께 기획했다. 이 전 대표는 지난 2015년 같은 곳에서 김환기로 시작해 박서보·이우환 등으로 이어지는 ‘단색화’전을 기획해 서양 모노크롬(한 가지 색의 회화)의 아류로 치부되던 다른 단색화의 행위성과 물성 등을 재발견했고 이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단색화 전시가 기획됐다. 전시 전후 3년새 작품값이 10배 상승하고,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커지는 등 부가효과가 이어졌다.

전광영의 '집합' 연작 세부 모습. 고서의 한지로 접은 세모꼴 조각들 수천개를 조합해 제작된 작품이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전광영의 '집합' 연작 세부 모습. 고서의 한지로 접은 세모꼴 조각들 수천개를 조합해 제작된 작품이다.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


이용우 큐레이터는 전광영이 사용하는 한지라는 재료에서 지속가능성, 친환경적 가치를 강조했다. 전 작가는 어릴 적 조부의 한약방에서 경험한 진한 약냄새와 약봉지들의 기억을 떠올려 1995년 무렵부터 한지 재료의 ‘집합’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 큐레이터는 “적어도 70~80년에서 150년 전에 만들어진 책들을 해체해 낱장이 된 한지를 사용하기에, 전생에 책이던 것이 현생에 전광영을 만나 예술로 다시 태어난 작품들”이라며 “인간은 자연에서 왔고 자연적 소재가 인간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한의학에서 영감을 얻은 오가닉(친환경의) 예술이다”고 말했다.

한약 봉지처럼 한지로 감싸는(wrapping) 행위에 대해 이 큐레이터는 개선문과 퐁네프 등을 천으로 쌌던 대지예술가 크리스토의 사례를 들어 “싸는 행위는 무의미를 의미있게 만들고 있던 의미도 무의미하게 가리는 ‘의미의 전복’이며 상당히 사회적, 정치적인 행위”라며 “지구가 공존의 별임을 깨닫고 잘 가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실천적 예술’의 가치”라고 짚었다.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11월27일까지 열리는 전광영의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의 전경.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11월27일까지 열리는 전광영의 개인전 '재해석된 시간들'의 전경. /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


전시장 내 안뜰에는 ‘한지 하우스’가 뾰족히 솟아 물길을 오가는 베니스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가 전광영의 세모꼴 한지에서 영감얻어 지은 집이다. 보에리는 이탈리아 밀라노, 스위스 로잔 등에 지은 ‘수직 숲(Vertical Forest)’ 개념의 건축으로 유명한 친환경주의 건축가다. 천년 가는 한지의 속성에 감탄한 보에리는 고밀도 섬유와 목재, 코팅된 종이를 이용해 집을 지었다. 이후 다른 곳에서도 전시 가능한 접이식 건축이며, 집을 해체해 나오는 모든 재료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전시는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예술의 역할을 웅변한다.


글·사진(베니스)=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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