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세계질서와 문명등급’은 베이징대·런민대 등 중국 학자들과 중국계 미국인 교수 등 11명이 세계사적 시각에서 지난 500년간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적 문명론을 비판한 책이다. 동북공정 연구를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들도 여럿 참여했다. 책은 문명등급론이 유럽과 미국 기독교 사회는 ‘문명국가’에 위치시키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는 ‘야만 국가’, 중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는 ‘미개화한 몽매국가’로 서열화하면서 서구의 패권적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해왔다고 주장한다.
또 문명등급론이 제국주의 쇠퇴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의식과 일상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문명론은 오히려 유럽 계몽운동이 내세웠던 이성주의 담론과 함께 서구 세계가 잔혹한 식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무역을 강제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구성한 것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형태이다.”
책은 최근 중국의 신장·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 시진핑 국가 주석의 1인 독재 체제 등에 대해 서구의 비판이 거세진 데 대한 학술적 반격으로도 읽힌다. 가령 서구에서 주권보다 인권을 더 상위의 가치로 놓고 있는데 대해서는 20세기 민족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학문적 의미를 떠나 국제적인 체제 옹호 선전전을 펼치고 있는 시진핑 정부의 이론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