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이슈 리포트]BOJ '엔저 도박' 고집…잃어버린 40년 도화선되나

이지평 한국외국어대학교 특임강의교수

■수렁에 빠진 日 경제

엔화 가치 급락에도 경상적자 갈수록 커져

지지부진한 성장률·전국민 생활고 가중 등

'나쁜 엔저'가 부른 후유증 더 깊어질 수도

韓경제도 재정 건전성 향상·구조개혁 시급

고통 따르고 인기 없는 정책이기는 하지만

국민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 필요




늙은 부자 나라에서 빈곤화 우려


일본 엔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달러당 115엔이었던 엔화는 올 4월 22일에 128엔으로 10.2%나 떨어져 주요국 통화 중에서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좋은 엔저’를 강조했던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도 이제 ‘급격한 엔저는 문제’라고 경계할 정도다. 사실 2012년 1월 이후 올해 4월 22일까지의 엔화 하락률은 39%에 달해 아시아 통화 위기 당시의 한국·태국 등과 비슷한 절하율이 됐다.

이러한 엔저 현상은 일본의 금융 완화 정책의 장기화가 주된 이유이지만 일본의 무역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올해에는 경상수지도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것이 일본 경제 및 엔화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으로서의 지위를 30년 이상 유지하고 있으나 경상수지가 적자에 빠질 경우 해외 자산이 감소세로 돌아설 우려가 있다. 만약 일본이 해외 채권 감소 국가가 되면 막대한 재정 적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해외 자금에 의존해야 할 처지가 될 수 있다.

물론 당장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지만 엔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출·생산·투자 확대, 고용 개선 등의 선순환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일본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사실 1990년대 이후의 장기 불황으로 인해 일본의 1인당 소득은 주요국 중에서 유일하게 오랜 기간 정체돼왔다.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대 초에 미국을 능가했으나 2021년 기준으로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30년 정도 일본 경제가 정체된 결과다.

게다가 올 3월 기준으로 일본의 물가 수준 변화를 고려한 실질실효환율은 50년 전인 1970년대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다. 이는 일본 경제의 만성적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인해 물가와 임금이 계속 정체되면서도 엔저가 장기화됐기 때문이며 일본 국민으로서는 노동을 통해 받는 임금으로 해외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주 불리해졌음을 의미한다. 일본 국민 전체적으로 보면 빈곤해지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임금은 제자리인데 물가 상승률마저 높아져 일본 서민의 생활고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져도 일본은 막대한 해외 자산으로 여유를 가진 늙은 부자 나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지만 이제 경제적인 쇠퇴와 함께 빈곤 문제가 우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절정기에서 추락해 장기간 정체된 이유


일본 경제는 1980년대 후반에는 급격한 엔고와 함께 자산 버블 경제를 구가한 바 있다. 엔화는 1985년 1월의 달러당 254엔에서 1988년 12월에는 123엔으로 무려 106%의 절상률을 기록할 정도의 급격한 강세를 보였으며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절정기에 있었다. 그러던 일본이 이처럼 어렵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도 대증요법으로 시간을 버는 데 급급했던 측면이 있다. 부동산 버블 붕괴와 함께 급증한 부실 채권 문제에 대응해 일찍 공적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지만 당시 국민들의 반발이 커 일본 정부는 재정 확대 등의 경기 부양책으로 경기가 회복되면 자산 가격도 상승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와 같이 문제를 덮어버리고 상황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는 정책은 재정 확대 정책의 효과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고 민간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재정 적자를 누적시키는 요인이 됐다. 2000년대 중반에 ‘고이즈미 개혁’으로 부실 채권 문제는 겨우 해결됐으나 15년 정도의 시간 낭비로 인해 일본 경제의 만성적인 수요 부족, 디플레이션 압력이 고조됐다.

버블 붕괴에 따른 위기 대처에 고전한 가운데 중장기적 과제인 저출산 및 인구 고령화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미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일본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2012년 말에 집권한 아베 신조 2차 내각에서 실시됐던 소위 아베노믹스도 일본 경제를 근본적으로 회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대폭적인 금융 완화, 재정 확대, 성장 전략이라는 세 가지 화살은 당초 일본 경제의 회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2%의 실질 경제성장률, 2%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본원통화를 늘려도 투자 수요가 없어 대출이 증가하지 않아 물가 상승에 한계를 보였다. 초금융 완화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했던 통화주의자의 실험이 실패한 셈이다. 아베노믹스 이후의 초엔저로 인해 일본 수출 대기업의 수익성은 개선됐으나 투자가 부진하고 실질임금은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아베노믹스는 자국 통화가치를 파괴하면서 일본 국민의 빈곤화를 초래한 셈이다.

성장 전략을 제대로 추진해 일본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일본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감가상각 수준으로 억제하고 기존 설비로 최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데 주력했다. 초저금리 때문에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나 좀비 기업도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이는 일본 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제약하는 요인이 됐다.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적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돼 다소 경쟁력이 있는 일본 기업도 일손이 달린 일본에서의 대규모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강해졌다. 스타트업의 성장과 새로운 산업의 창조를 통한 선순환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메커니즘도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일본 경제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저성장 지속, 탈탄소화와 디지털화로 인한 투자 확대 여부가 변수


일본 경제는 코로나19 충격으로부터의 회복세도 상대적으로 더디고 일본의 주요 연구기관들이 올 1분기 성장률도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올해 성장률은 1~2% 내외 수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성장세 부진도 이어지고 있어 일본은행은 각종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초금융 완화 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당분간 엔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정책 방향도 참의원 선거 후에 정권 기반을 다져야 아베노믹스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 전략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책을 모색하면서 보다 분배를 중시하고 일본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 방향을 찾고 있다. 물론 일본의 저출산·고령화, 노동력 부족, 엔저 및 일본 자산의 국제 가격 하락으로 인해 일본 기업들로서는 자국 내 투자보다도 해외 투자를 선호하는 현상을 쉽게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민간 투자의 해외 유출 현상이 개인 자산의 해외 이탈로까지 파급될 경우 초엔저와 함께 일본 경제의 위기적 상황이 심화될 위험도 있다. 사실 아베노믹스 등장 초기에도 초엔저와 자본 유출로 일본의 재정이 파탄할 가능성이 우려된 적이 있었다.

물론 일본의 개인저축은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이들이 해외 투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위기 시나리오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일본 경제계도 기시다 내각의 ‘새로운 자본주의’에 호응하면서 탈탄소화·디지털화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기존의 철강·화학·전기전자·자동차 등 주요 산업의 탈탄소화에는 오랜 기간 막대한 투자가 소요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탈탄소화의 기초 기술을 상당히 개발한 상태이며 이를 점차 상용화하면서 일본 경제의 회생과 재정 건전성의 회복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일본 경제 추락으로부터 얻을 교훈


일본 경제의 부진과 위기 요소에서 우리 경제도 유익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경제정책은 단기적인 처방도 필요하지만 장기적 시각에서 중요한 구조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 차원의 구조 개혁이나 생산성 향상 노력, 재정 건전성 제고 대책 등은 고통도 수반되며 인기가 없는 정책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을 설득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둘째, 산업의 탈성숙화를 위한 조직 역량의 강화가 중요하다. 기존 산업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것과 신사업·신제품·신기술로 끊임없이 혁신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기업의 신진대사, 기업과 사업의 인수·합병 시장 기반의 정비, 스타트업 육성 기반의 강화, 캐치업형 산업 정책과 차별화된 혁신형 산업 정책 등이 중요하다.

셋째, 일본이 장기 불황 극복에 체력을 낭비한 가운데 세계적 트렌드인 디지털화를 놓친 것이 큰 화를 초래했는데, 우리의 경우도 탈탄소화·디지털화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산업의 혁신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지평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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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 도쿄 출신의 한국 국적 일본 경제 전문가이다.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제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8년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한 뒤 33년간 근무하면서 경제 연구 부문 수석연구위원, 미래연구팀장, 산업 연구 부문 에너지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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