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과학기술 부처 외에도 다른 10여 개 부처들이 연구개발(R&D) 기획과 집행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힘이 더 센 부처들은 과기 부처가 일관성 있게 과학기술 정책을 주도해 국가 R&D 전략을 짜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은 1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과기 부처가 학문적이고 학구적인 분야를 담당하고 다른 부처들은 응용 분야를 맡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운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른 부처들도 모두 R&D부터 맡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과기 부처와 대통령실에서 강력하게 최고 효율의 구조를 만드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특정 부처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부처 간의 높은 칸막이와 부처 간, 기관 간 이기주의로 인해 정부가 정책의 최대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부처 입장에서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구축하면 밥그릇을 뺏기게 된다고 생각해 정부에서 컨트롤타워를 좋아하지 않는 목소리가 훨씬 크다”고 꼬집었다.
유 원장은 “과기부가 되든 과기처가 되든 과기부총리제를 도입하든지 조직 형태나 구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어떤 방식이든 과학기술을 가장 우선시하는 조직 형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체제로 개편해 교육과 과학을 합쳤으나 교육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과학도 어설프게 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따라서 대통령실 직제 개편에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과학교육수석처럼 과학과 교육을 섞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정부 부처든 대통령실이든 과학을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버넌스가 돼야 한다”며 “새 정부가 경제수석 밑에 과학비서관을 두게 된다면 과학이 경제수석실에서 세 번째로 다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면 과학기술 기반 국가 성장은 더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 원장은 “고대 이집트사에서부터 시작해 현재의 미중 기술 패권 전쟁까지 돌아보면 과학기술이 우세한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고, 경제 성장 기반을 만들었고, 문화 강국도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빠른 추격자(패스트 팔로어)’ 시대에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했으나 아직 과학기술 선진국이 되지 못했다는 게 유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은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했고 양자컴퓨터나 반도체의 원천 기술을 창조하지도 못했다”며 “노벨상을 수상하거나 노벨상에 준하는 기술 개발이나 창의적 연구가 꾸준히 이어지는 나라가 과기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경제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시절에는 빨리 쥐어짜서 곧바로 결과를 내야 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창의적 연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그렇게 30~40년을 살았다”고 했다. 이어 “과학기술인이 1~2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유 원장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행보와 관련, “대선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깊이 이해하는 내공을 보여줬다”며 “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각 분야에서 실력을 우선해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등의 진용을 짰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력은 별로인데 자기 홍보에만 능한 엉터리에게 속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제는 연구비나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고 더 나은 과학 정책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도 과학기술을 총체적으로 조정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반도체·인공지능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주로 과기 부처 장관이 배출되는 것과 관련해 “바이오·생명과학 분야가 IT보다 10배쯤 큰 데도 그런 인선이 이뤄지는 데 대해 저도 생명과학자로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아직 힘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