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작가

여행 떠나서도 일 생각 못 벗어나

성취 매진하는 삶이 몸 망가뜨려

뭔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 버리고

'지금의 나' 아껴주는 연습 시작을








어린 조카가 갑자기 게임도 안 하고 학원도 안 가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게임을 안 하겠다는 것은 반가운데, 학원도 안 간다고 하기에 살짝 걱정스러웠다. 뭐든지 웬만하면 신나게 참여하는 밝은 아이였기 때문에, 무슨 마음의 상처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스스로 ‘딱 일주일만 아무것도 안 할게’라는 단서를 달아, 살짝 안심했다. 인생에서 일주일쯤이야. 단 일주일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내 평생에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용기를, 아홉 살 조카가 먼저 내준 것이다. 여행을 떠나서도 일 생각을 쉬지 못하는 나는, 단 하루도 시원하게 놀아본 적이 없었다. 어린 조카가 갑자기 멋있어 보였다. 어린 것이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 것도 안 하는 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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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상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서 실외 마스크착용이 해제되고 ‘이제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분위기가 사람들 마음을 더 바쁘게 하는 것 같다. 뭐든지 그동안 못 했던 것은 다 해내야 할 것 같다. ‘보복쇼핑’이라든지 ‘보복여행’이라는 기이한 조어도 사람을 심란하게 한다. 다들 뭘 못 해서 화가 난 것 같다. 하지만 우린 다행스럽게도 다른 나라 같은 심각한 ‘셧다운’을 겪지 않았고, 일상을 어떻게든 지켜낼 수 있었다. ‘보복’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피할 수 없는 단어이기에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냥 즐겁게 쇼핑하고 신나게 여행하면 되는 것이지, 행복한 일 앞에 기어이 ‘보복’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건 과도한 처사다. 사람들이 ‘이제 뭔가를 부지런히 해야만 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을 보니, 나는 오히려 진심으로 쉬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 역시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라, ‘이제 새로운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또 한 번 무리를 하고 말았다. 반드시 새로운 책을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난 왜 이렇게 부족할까’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나머지 기어이 몸에 탈이 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병원에 다니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난 욕심꾸러기가 아니다, 아니다’하면서도 결국 욕심을 내고 있었다. ‘항상 부족한 나’를 탓하는 마음의 습관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의 소원이었던 판검사가 되지 못했고,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교수가 되지 못했고, 엄마가 그토록 싫어했던 작가가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는 작가가 되려면, 평범한 작가가 아니라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나’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몰아세웠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몸이 너무 힘들다. 치유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휴식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조차 없애고 싶다.’ 잠에서 막 깬 뒤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가장 솔직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을 때, 내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아웃풋을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뭔가 투입하고 뭔가 노력하고 뭔가 성취를 위해 달리는 삶이 내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나는 울고 있는 우리들의 내면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는 연습을 시작하자. 내가 나여서 좋아. 그 누구도 아닌 나여서 좋은 나를, 응원하고 보살피고 이해해주자.” 그렇게 속삭인 다음 날, 오랜만에 실컷 꿀맛 같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당신은 응원받을 자격이 있다. 당신은 무조건 이해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니 움츠리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오늘의 나를 힘껏 안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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