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전략과 이에 맞서 남태평양을 공략하는 중국의 대립이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남태평양 8개국 순방 일정이 진행되면서 갈수록 고조되는 분위기다. 중국은 남태평양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한 지원을 약속하며 역내 안보·경제협력 협정 구상을 펼치려 하고 있지만 왕 부장의 방문을 앞둔 피지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기로 하는 등 남태평양 도서국들의 셈법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해지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8일 남태평양이 미중 간 지정학적 경쟁의 최전선으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이 지역의 도서국인 피지가 전날 미국 주도 IPEF의 14번째 가입국이 됐다고 보도했다. 전날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성명에소 “피지가 남태평양 국가로는 처음으로 IPEF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피지 주재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태평양 섬나라가 누구 집의 ‘뒷마당’이 아닌 국제 협력의 큰 무대가 돼야 한다”며 "중국의 외교정책과 중국과 태평양 섬 관계를 훼손하려는 시도는 어떠한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논평했다.
이번 발표는 왕 부장이 열흘간 남태평양 도서국들을 순방하며 미국의 대중 포위를 뚫기 위한 중국·태평양 도서국 협력체 설립을 모색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중국은 왕 부장의 순방에 맞춰 태평양 지역 14개국 가운데 10개국에 중국과의 포괄적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협정 초안을 보낸 상태다. ‘중국·태평양국 공동 발전 구상’이라는 제목의 초안에는 경찰력, 사이버 안보, 해양 감시 등을 포함한 안보 교류를 증진하는 것 외에 역내 자유무역지역 설립 가능성을 검토한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30일 피지에서 열리는 중국·태평양 도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이 같은 구상을 공개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를 위해 왕 부장은 각 순방국에서 일대일로 강화를 통해 부족한 인프라나 환경 개선을 약속하며 상호 협력을 이어가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솔로몬제도에서는 안전한 환경 조성, 기후변화 공동 대처, 개발도상국 이익의 공동 보호 등에 합의했으며 키리바시에서는 중국 응급 의료팀이 전염병 퇴치와 의료 서비스 지원에 나서는가 하면 캔턴섬 활주로 개·보수 지원을 약속했다. 이곳은 하와이에서 불과 3000㎞ 떨어진 섬으로, 중국이 군사적 이용 가치를 노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사모아에서도 기후변화 및 인프라 개발을 위한 협력을 강조했다. 왕 부장은 사모아를 떠나 피지·통가·바누아투·파푸아뉴기니·동티모르 등도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이처럼 중국이 남태평양 순방에 공을 들이는 것은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왕 부장의 순방 도중 미 국무부가 중국을 “국제 질서의 가장 심각한 장기 도전”이라고 비판하며 대중국 전략을 발표한 것도 이 같은 시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 부장은 세 번째 방문국인 사모아에서 기자들과 만나 “14억이 함께 현대화를 향해 가는 것은 인류의 거대한 진보이지 세계에 대한 위협과 도전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중미 관계는 미국이 설계한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미국 측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대일로의 공동 건설, 시진핑 주석이 제안한 글로벌 발전 구상 및 글로벌 안보 구상은 국제사회의 폭넓은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며 “반면 미국은 중도주의와 예외주의를 견지하고 냉전의 정신을 이어오며 패권의 논리를 따라 ‘블록 정치’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 같은 남태평양을 포섭하려는 중국의 시도가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피지의 IPEF 가입 외에도 앞서 20일 미크로네시아 연방 공화국이 역내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중국 측 제안이 “새로운 냉전 시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는 등 중국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 국가가 미중의 지정학적 경쟁을 이용해 최대한 지원을 얻어내려 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랴오청대 태평양도서국 리서치센터의 유 레이 수석연구위원은 SCMP에 “이들 국가가 경제 회생을 위해 더 많은 인프라 투자와 관광·어업 분야의 지원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