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과 SK·현대자동차·LG·롯데·한화 등 대기업들이 향후 5년간 1000조 원 넘는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한층 달아오르고 있다. 대기업들의 투자 계획 면면을 뜯어보면 대부분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소재 사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줄 소부장 벤처기업들이 최대 수혜주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리 상승 속에 코로나19 쇼크에서 벗어난 거시경제 상황이 벤처캐피털(VC) 업계의 시선을 바이오·플랫폼에서 멀어지게 한 데 이어 대기업들의 천문학적 설비투자 계획이 제시되자 기술력을 갖춘 소부장 기업들의 몸값은 높아지고 있다. VC들은 유망 소부장 기업들을 발굴하기 위해 대형 신규 펀드를 조성하고 관련 산업에 정통한 중견 심사역들에 부쩍 힘을 싣고 있다.
국내 VC들은 최근 3~4년을 제외하면 출발부터 소부장 기업 투자를 전문으로 하며 성장해왔다. 하지만 벤처 투자 시장에서 소부장 기업을 밀어내고 바이오 투자 붐이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하고 플랫폼 및 전자상거래 관련 기업들이 득세하면서 소부장 전문 투자 심사역들은 신기술 트렌드에 해박한 후배들에게 밀려 적지 않은 수가 뒷방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VC의 중견 심사역들이 소부장 투자 붐을 기대하며 귀환하자 아주IB투자·SBI인베스트먼트·LB인베스트먼트 등 소부장 투자 경험이 많은 전통적 VC들의 역할도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신진호 다올인베스트먼트 부회장은 “2010년 전까지 VC들은 소부장 기업에만 투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바이오·플랫폼 기업으로 눈을 돌렸던 심사역들이 다시 소부장 분야 투자처 발굴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소부장 기업 투자를 목적으로 결성하는 전문 벤처 펀드의 출현도 증가하는 추세다. 미래에셋벤처투자와 위벤처스는 최근 소부장 펀드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펀드를 결성해 운용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전기차 관련 소부장 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안다아시아벤처스도 올 초 200억 원 규모의 소부장 펀드를 결성하고 적극적으로 유망 기업 발굴에 나서고 있다.
정부 역시 소부장 산업 지원을 위해 하반기까지 1조 7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기로 해 VC들의 소부장 펀드 결성 바람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시국에 몸값이 높아진 바이오·의료 업체들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해 투자 심리가 급속도로 냉각된 반면 매출과 수익이 확연히 좋아진 소부장 기업들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벤처캐피탈협회의 한 관계자는 “바이오벤처 시장이 빠르게 성장했지만 지난해부터 증시 문턱이 높아지면서 투자금 회수가 어려워져 VC 업계가 바이오벤처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증시에 상장한 벤처기업들의 주가가 투자의 판이 바뀔 수밖에 없는 배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올 2월 코스닥에 상장한 바이오에프디엔씨는 30일 공모가(2만 8000원)보다 12% 낮은 2만 4550원에 거래를 마쳤다. 3월 코스닥에 입성한 체외 진단 플랫폼 업체 노을의 경우 공모가(1만 원)보다 35% 낮은 6500원을 기록했다.
반면 소부장 기업들의 활약은 증시 부진 속에 단연 돋보인다. 특히 올해 상장한 공모주 중에서 소부장 기업들의 주가 강세가 두드러진다. 이달 20일 코스닥에 오른 시스템반도체 업체 가온칩스는 이날 공모가보다 88% 높은 2만 6350원에 거래를 마쳤다. 투자자들이 가온칩스가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확보한 독보적 경쟁력을 높게 사고 있다는 해석이다.
3월 상장한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전문 업체 세아메카닉스는 공모가(4400원)보다 65% 높은 주가를 기록 중이며 올해 2월 코스닥 시장에 입성한 카메라 모듈 관련 자동화 전문 업체인 퓨런티어도 공모가(1만 5000원)를 55% 웃도는 가격을 나타내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메탈 마스크 제조 업체인 풍원정밀 또한 2월 상장 후 공모가(1만 5200원)를 21% 상회하는 1만 8400원을 기록했다.
한 VC 업계의 관계자는 “바이오벤처들이 몸값을 스스로 낮춰서 투자 유치를 하려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면서 “전통 제조 업체들의 경우 바이오 업체들에 비해 투자 수요가 살아 있는 모습”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