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량이 줄지 않았더라도 정년이 늘었거나 회사 경영이 어려워졌을 경우에는 임금피크제를 적용해도 합법이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이 지난달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산업 현장에서 발생한 혼란이 이번 판결로 인해 다소 수그러들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는 16일 KT 전·현직 직원 1300여 명이 회사를 상대로 임금피크제로 삭감된 임금 각 1000만 원씩을 지급하라고 제기한 소송의 선고 공판을 열고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선고했다.
소송의 쟁점은 KT가 실시한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 차별인지 여부다. 직원들은 “일방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 56세부터 매년 10%씩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정년도 만 58세에서 60세로 연장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직원들이 받을 수 있는 총 임금액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정년 연장 자체가 임금 삭감에 대응하는 가장 중요한 보상”이라며 “업무량과 업무 강도가 명시적으로 줄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 차별이라고 쉽사리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개정 법에서 정년 연장에 따른 임금 삭감 등 체계 개편을 주문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
또 임금피크제 노사 합의 당시 KT의 영업손실이 컸다는 점도 사측 승소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KT는 2014년 영업손실 2918억 원, 당기순손실 9655억 2900만 원을 기록하는 등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재판부는 당시 KT가 정년 연장에 따른 인건비 상승에 대비해 임금피크제를 실시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KT 직원들이 임금피크제 노사 협약 당시의 절차적 정당성과 노조위원장의 대표권 남용 등도 지적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한국전자부품연구원 직원이 제기한 임금피크제 관련 재판에서 “업무 강도는 그대로인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깎는 건 차별”이라며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당시 ‘합리적 이유’의 근거로 ‘노동 강도’를 들었는데 이번 판결을 통해 ‘정년 연장 여부’와 ‘회사 경영 사정’ 등이 추가된 셈이다. 같은 강도의 일을 하면서도 나이가 들어 월급이 깎였더라도 정년이 늘었거나 회사 경영 사정상 불가피했을 경우에는 합법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개별 회사 상황이 감안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노조들의 대규모 임금피크제 소송 예고에 떨고 있던 기업들은 한시름 놓게 됐다. 지난달 대법원 판결 이후 삼성전자·현대자동차·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기업 노조는 임금피크제 폐지 요구를 공식화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