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일본은 침몰할 겁니다" 일본의 관습에 도전한 한 가족 이야기 [지브러리]

1995년 일본에서 출연한 이상한 육아공동체 ‘침몰 가족’

전통적 가치관 소멸 시 일본 침몰할 거라는 정치인 발언에서 따온 이름

‘보통 가족’이 아니라도 육아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대안 제시





우리나라에서는 피가 섞이지 않은 ‘비혈연가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법 제779조 및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에 비혈연가구는 포함되지 않는다.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아이를 기르기 위해 함께 모여 살더라도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하는 세대 구성 및 가구 구성 분포 통계에 ‘비혈연 가구’가 조사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육아는 오롯이 아이 부모의 책임이다. 온전한 육아를 위해 경제활동을 병행해야 하는 부모들은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부모들의 부담을 누군가가 같이 짊어져 준다면 더 나은 육아가 가능하지 않을까. 1995년 일본에서는 이 같은 부모들의 육아 부담을 해결하기 위한 전례 없는 ‘이상한 가족’ 형태가 출현한 적이 있었다.



“저희 아이를 함께 길러주실 분 없나요?”




지난 1995년 일본 사회를 놀라움에 빠지게 한 가족 형태는 ‘침몰 가족’으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여기서 자라난 아이가 바로 가노 쓰치였다. 가노 쓰치는 1994년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약 8개월까지는 엄마 ‘호코'와 아빠 ‘야마’와 함께 셋이서 살았다. 그런데 호코와 야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호코는 야마와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고민 끝에 둘은 갈라서게 된다. 아이의 아빠와는 갈라섰지만, 호코는 자신이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됐을 때 일하며 아이만 키우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아이를 방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 여러 사람과 함께 키우고자 했다. 가마쿠라에서 공동육아를 시도하려 했지만 참여자가 적어 실패했고 결국 쓰치와 둘이서 도쿄의 히가시나카노로 이사했다. 호코의 엄마(쓰치의 외할머니)는 아이를 돌봐 주겠다며 호코와 쓰치를 고향으로 불렀다. 그러나 호코는 혈연관계의 가족에서 벗어나 열린 관계를 지향했기에 엄마에게 가는 대신 동네 사람들에게 전단을 돌렸다. “공동(?) 육아 참여자 모집!”



“전통적 가치관이 없어지면 일본 침몰할 것"이라는 정치인 발언이 탄생시킨 ‘침몰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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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동 육아’라고 하면 보통 아이가 있는 여러 가정이 모여 아이를 함께 키우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인데 부모님이 함께하는 곳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호코가 만들었던 공동 육아 모임은 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는 아이가 없는 어른도 공동 육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쓰치 혼자 보살핌을 받았지만 어떤 때는 쓰치 외에 다른 아이들도 함께 살며 보살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집안은 항상 아이와 어른들로 한데 모여 시끌벅적했고 아이를 보는 사람은 매일매일 바뀌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집에 항상 간단한 식사나 마실 것이 구비되어 있기는 했으나 돌보미들에게 따로 아이 돌봄 비용이 지급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호코는 물질적인 대가보다는 정말로 아이를 함께 돌보고 키울 사람을 찾고자 했다.

사진=영화 ‘침몰가족’ 공식 트위터사진=영화 ‘침몰가족’ 공식 트위터


호코는 이 가족 형태를 ‘침몰 가족’으로 불렀다. 이름 탄생에는 다음과 같은 비화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한 정치인이 “지금 일본은 가족의 유대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혼 가정도 늘고 있습니다. 남자는 일 하러 가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사라진다면 일본은 침몰하고 말 겁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 글을 본 호코와 다른 침몰 가족 구성원이 “그럼 우리 가족은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 ‘침몰 가족’이네!”라고 말하면서 이름을 정했다. 처음에는 호코와 쓰치의 집에 돌보미들이 드나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이 늘어나자 더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3층 규모의 주택을 구해 살게 된다. 초창기 입주민은 쓰치 모자와 다른 한 모자, 독신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으로 각자 방을 나눠 쓰며 생활했다. 일명 ‘침몰 하우스’로 지금의 셰어하우스와 같은 개념이다. 이후에도 여러 돌보미가 ‘침몰 하우스’를 드나들며 살게 된다.

‘보통’의 가족에서 자라지 않아도 훌륭한 사회 구성원 될 수 있어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아이를 맡길 수가 있었을까. 호코는 침몰 가족 운영의 안정성을 위해 규칙을 만들었다. 돌보미들은 교대 시간을 정해 호코가 아이를 볼 수 없는 시간에 아이를 돌봤다. 처음 온 사람은 아이와 둘만 남지 않도록 꼭 경험자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함께 육아 노트를 썼다. 다음 교대자를 위해 ‘아이와 있었던 일’, ‘챙겨야 할 내용’,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방대한 내용을 적었다. 매달 아이의 행동과 반응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육아 회의 시간’도 만들었다.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나 보육원에서 부모님 참여 행사가 있으면 시간이 되는 모든 돌보미가 참여하면서 아이와 어른 간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한 것. ‘침몰 가족’은 꼭 피가 섞인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바른 방향으로 자랄지에 대해 고민하며 아이를 기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쓰치는 9살이 될 때까지 침몰 하우스에서 여러 어른과 함께 살았다. 이후 ‘하치조지마’라는 섬으로 이사 가서 호코와 둘이 살았다. 여럿이서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을 다시 보고 싶었던 쓰치는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대학교 졸업 작품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2019년에 정식으로 개봉하면서 ‘침몰 가족’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물론 일본에서도 ‘침몰 가족’과 같은 가족 형태는 특이한 경우다. 쓰치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졸업 세미나 내에서도 침몰 가족’이라는 게 뭐냐는 반응이 많았다”며 “나에겐 당연한 환경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라서 그만큼 놀랄 만한 환경이구나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육아의 책임을 오롯이 부모만이 져야 한다는 강박감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침몰 가족’이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은 분명하다. 쓰치는 “적어도 많은 어른에게 둘러싸여 자란 유소년기는 인생의 양식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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