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꽂이]쿠바 핵전쟁을 막은 건 리더십 아닌 '운과 공포'였다

■핵전쟁 위기(세르히 플로히 지음, 삼인 펴냄)

美-소련 오해·오판 '쿠바 위기' 불렀지만

핵버튼 못 누른 건 지도자의 공포·운 덕분

美 관점 벗어나 소련 자료로 사태 파헤쳐

핵무기 둔감해진 오늘날의 세계에 '경종'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2년1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참가했다가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악했다. 1962년 쿠바 위기 때 소련군 핵심 관계자였던 아나톨리 그립코프 전 바르샤바조약군 사령관이 당시 소련이 4만3,000만명의 병력과 함께 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미사일 9기, 전술 핵무기를 쿠바에 숨겨 놓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참모진들은 쿠바 주둔 소련군은 1만명 미만에 불과하다고 봤고 핵미사일 배치 사실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만일 미국의 쿠바 침공이 감행되었고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았더라면 핵전쟁이 발발했을 확률은 99퍼센트였다”는 것이 맥나마라의 탄식이었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기지 지도./사진제공=삼인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기지 지도./사진제공=삼인


논픽션 신간 ‘핵전쟁 위기’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대목이다. 케네디 행정부는 학벌은 좋지만 비슷한 성향의 참모진이 포진한 탓에 이른바 ‘집단 사고’의 함정에 빠져 쿠바 피그스만 침공이라는 오판을 했다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쿠바 위기는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게 서구의 시각이다. 하지만 책은 ‘핵 어리석음(Nuclear Folly)’이라는 원제가 말해주듯 미·소 지도부가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오판, 무책임으로 실수를 거듭하다 전세계를 핵전쟁 일보직전으로 몰아 갔다고 말한다. 인류가 석기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공포’와 ‘운’ 덕분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소련 출신 우크라이나 역사학자인 세르히 플로히(65) 미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겸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이다. 그동안의 연구가 미국 관점에서 케네디의 위기 극복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면 플로히는 새로 발굴한 소련의 문서고 자료와 우크라이나에 보관 중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자료를 활용해 당시 크렘린의 의사 결정 과정, 소련의 미사일 전력 동원과 파견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는 존 F. 케네디(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진제공=삼인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는 존 F. 케네디(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진제공=삼인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61년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서베를린을 자유도시로 만들고 동독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서베를린에서 서방 군대 철수를 뜻했다. 케네디가 거부하자 흐루쇼프는 화를 내며 “만일 미국이 독일을 놓고 전쟁을 벌이겠다면 그렇게 하시죠.”라고 협박했다. 그 해 8월 흐루쇼프는 서베를린 주변에 철조망을 두르고 봉쇄했고 미군 탱크와 소련군 탱크가 장벽을 두고 대치했다. 하지만 전쟁을 원치 않았던 양측은 결국 탱크를 5m씩 순차적으로 후퇴시키는 것으로 합의한다.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흐르쇼프는 반격 방안을 모색했다. 소련의 불만 중 하나는 튀르키예(옛 터키)에 배치된 미군의 주피터 미사일이었다. 사정거리가 2400㎞에 달해 모스크바마저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은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했다. 흐루쇼프는 흑해 해안을 걷다가 쿠바 해안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방안이 떠올랐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핵전쟁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치킨 게임’에서 미국이 굴복하거나 외교적 해법이 가능할 것으로 오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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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중거리 미사일./사진제공=삼인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중거리 미사일./사진제공=삼인


같은 해 10월10일 미군 정찰기가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준중거리미사일(MRBM)을 발견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인류를 핵 전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양국 지도자들의 지도력이나 정치력, 결단이 아닌 ‘공포의 균형’이었다. 이들은 일본 원자폭탄 투하의 그늘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1954년 미국 캐슬 브라보 실험과 1961년 소련의 차르 붐바 실험으로 수소폭탄의 파괴력을 실감했다.

케네디는 당초 쿠바의 소련 미사일을 선제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쿠바 미사일이 발사 준비가 돼 있다는 미국중앙정보국(CIA) 보고를 받고 한발 물러나 10월22일 저녁 7시 대국민 연설에서 쿠바 봉쇄 계획을 발표한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려다 해상 봉쇄 소식을 듣고 소련 선박들을 회항하도록 했다. 더구나 위기가 가중되면서 이들의 군 통제력은 약화됐고 흐루쇼프나 케네디의 발언권마저 줄어들 정도로 강경파가 득세했다. 특히 쿠바에 있던 소련군은 미 공군의 무력 시위에 겁에 질려 모스크바의 허가 없이 미군 정찰기 U-2 2대를 격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소련 화물선 위를 비행하는 미 공군 P-2H 넵튠기./사진제공=삼인소련 화물선 위를 비행하는 미 공군 P-2H 넵튠기./사진제공=삼인


운도 따랐다. 10월29일 미 구축함들이 버뮤다 앞바다에서 배터리를 충전하러 수면 위로 올라온 소련 잠수함 ‘B-59’를 발견하고 둘러싸고 있을 때 미 대잠 항공기가 조명탄을 터뜨렸다. B-59는 공격 신호로 착각해 핵탄두 어뢰를 발사하려 잠수하려 했다. 이 때 미 구축함 하나가 탐조등으로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이마저도 늦을 뻔 했으나 다행히 앞서 내려가던 통신장교의 전등이 해치에 걸려 주춤한 사이 잠수함 사령관이 이 메시지를 보면서 어뢰 발사는 취소됐다. 핵 전쟁이 국가 수뇌부의 고뇌에 찬 판단이 아니라 전방 지휘관의 오판이나 우발적인 사건으로 발생할 뻔 했다는 것이다.

애들레이 스티븐슨 미국 UN주재 대사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쿠바 미사일 기지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제공=삼인애들레이 스티븐슨 미국 UN주재 대사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쿠바 미사일 기지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제공=삼인


결국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성장 배경, 이념, 정치적 지향, 통치 스타일은 전혀 달랐지만 비밀거래를 시도하게 된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고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소련은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쿠바의 미사일 체계를 제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알지도 못 했던 핵무기마저 철수했다.

책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들이 핵무기와 핵전쟁의 무서움 자체에 대해 무신경해지면서 ‘두 번째 핵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쿠바 사태를 교훈으로 삼아 1987년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2019년 8월 탈퇴했고 북한과 이란은 핵을 무기로 ‘벼랑 끝 전술’을 벌이고 있다.

존 F. 케네디(왼쪽)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사진제공=삼인존 F. 케네디(왼쪽)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사진제공=삼인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포퓰리스트들과 민족주의 정치가, 수정주의 독재자가 무책임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은 가망없는 명제라며 훨씬 더 나쁜 위기가 오기 전에 각국 유권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핵무기가 냉전 시대의 문제라는 믿음에서 벗어나 정치인들이 핵군축 협상을 재개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2만4000원.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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