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생산량 확대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직접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 측으로부터 ‘증산 확답’을 얻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우디는 오히려 미국 등 서방 진영의 비현실적인 탄소 중립 목표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며 바이든 대통령과 맞서기도 했다. 산유국 증산에 따른 공급 완화를 기대했던 국제 원유 시장에서는 9월 이후 증산량을 결정할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 회의(다음 달 3일 개최) 때까지 큰 변동성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만큼 원유 증산에 대한 미국과 사우디 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16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사우디 제다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3’ 정상회의에 참석해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한 (원유)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며 “에너지 생산 업체들은 이미 증산했으며 향후 수개월간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과 아랍 국가들 간의 원유 증산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사우디의 공식 반응과는 온도 차가 컸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사우디는 이미 최대 생산능력치인 1300만 배럴까지의 증산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를 넘어서는 추가 생산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무부 장관 역시 “GCC+3 회의에서 원유 관련 논의는 없었다”며 “OPEC+가 시장 상황을 평가해 적절한 생산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우디 측은 오히려 유가 상승을 미국 탓으로 돌렸다. 빈 살만 왕세자는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인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며 “실업률을 높이고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정책을 세우는 등 기후변화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급속한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현 상황이 초래됐다고 꼬집은 셈이다.
2018년 미국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빈 살만 왕세자가 오히려 인권 문제에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역공’을 펼치기도 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CNN은 “빈 살만 왕세자는 (카슈끄지 살해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답했다”며 “미군의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포로 학대 사건과 팔레스타인계 미국 언론인인 시린 아부 아클레 기자 피격 사건을 거론했다”고 전했다. 미군 역시 수감자를 학대하는 등 인권 문제가 상당한데도 자신만 몰아세우는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순방에서 유가 문제와 함께 주력해온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안보 협력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미국 매체들의 평가다.
외신들은 이번 바이든 대통령의 순방이 원유 증산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만 키웠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경기 침체 우려로 하락세를 보여온 서부텍사스산원유(WT)와 브렌트유 가격은 산유국 증산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며 이날 2% 안팎 상승했다.
다만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 만큼 다음 달 OPEC 회의를 여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당국자들을 인용해 두 정상이 원유 생산량을 늘리기로 비공개 합의했다고 전했다.
/워싱턴=윤홍우 특파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