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골프 골프일반

이승민 “투덜투덜 않고 더 열심히 할거예요, 완전 열심히”

제1회 장애인 US 오픈 우승

귀국 다음날 새벽부터 샷 연습·크로스핏 운동

자폐성 발달장애 딛고 골프로 세상과 소통

절단장애 선수들 투혼 보고 새로운 동기부여

법전 외는 우영우처럼 한번 간 곳 사진처럼 기억

이승민(가운데)이 장애인 US 오픈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캐디 윤슬기(왼쪽) 씨와 어머니 박지애 씨.이승민(가운데)이 장애인 US 오픈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캐디 윤슬기(왼쪽) 씨와 어머니 박지애 씨.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꺼내려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이 표현을 쓸 때는 막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 어디 한쪽이 불편한 장애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렇게 딱 열심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모습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투덜투덜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완전히 열심히.”

장애인 US 오픈 골프대회 초대 챔피언 이승민(25·하나금융그룹)을 28일 서울 강남구 보그인터내셔날 건물에서 만났다. 의류 브랜드 보그너를 이승민에게 후원하는 이 회사는 우승 기념으로 순금 20돈짜리 상패와 튤립을 주제로 한 회화 작품을 선물했다. 4년째 이승민과 함께하는 트레이너이자 캐디 윤슬기 씨에게도 보그너 300만 원 상품권을 특별 시상했다.

이승민은 2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에서 끝난 장애인 US 오픈에서 연장 끝에 우승했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그에게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 US 오픈의 트로피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트로피를 선물했다.

자폐성 발달 장애를 가진 이승민은 골프를 배우면서 2급에서 3급으로 장애가 완화됐다. 한국프로골프(KPGA) 정규 투어 대회에 추천 선수로 나가 두 차례나 컷 통과의 기적을 썼던 그는 절단 장애인들도 대거 참가한 이번 대회를 통해 꿈이 더 확고해졌다고 한다.



“조금 음… 약간 다른 점, 그러니까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고… 이런 선수로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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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는 최종 3라운드 18번 홀(파4) 두 번째 샷이라고 했다. 120야드 지점에서 칠 때 그린 방향을 나무가 가로막고 있었다. 이승민은 ‘나뭇가지를 맞을 수밖에 없으니 135야드를 쳐야 한다’는 캐디의 말이 순간 들리지 않았다. “불안하면 집중을 못하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계속 혼잣말만 하거든요. 캐디 형이 그때 정신 차리라고 버럭 소리 지르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어머니 박지애(56) 씨의 설명에 이승민은 당시 상황이 생생히 떠오른 듯 “하” 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차린 이승민의 피칭 웨지 샷은 딱 원하던 대로 나뭇가지를 스친 뒤 핀 5~6m에 떨어졌고 극적인 파 세이브 덕분에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 결국 우승했다.

경기 중 “할 수 있다”를 여러 번 되뇌는 모습이 현지 중계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 씨는 “비장애인에 비해 5시간 동안 계속 집중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몰입을 위한 방법으로 찾아낸 게 같은 말 반복이었다”며 “펜싱 박상영의 유명한 ‘할 수 있다’ 영상을 보여주고 ‘승민아, 너도 이렇게 계속 말하면 우승할 수 있다’고 얘기해줬다”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자’도 단골 구호다. 윤 씨가 “정신을!” 하면 이승민이 “차리자!” 하고 외치는 식이다.

이승민은 귀국 바로 다음 날부터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오전 6시께부터 샷 연습을 하고 이후 크로스핏 등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이어가는 스케줄이다. “엉덩이 근육이 빠져서 운동을 강하게 해야 한다”며 스스로 몰아붙이고 있다.

올해 KPGA 정규 투어 후반기 대회를 초청 선수 자격으로 최대 2개 뛸 수 있는 이승민은 가장 중요한 정규 투어 시드전도 앞두고 있다. 구름 관중과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PGA 투어 피닉스 오픈에 언젠가는 나가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도 본격적으로 알아볼 계획이다.

닮고 싶은 선수는 PGA 투어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한 임성재(24)다. 학창 시절부터 임성재와 알고 지낸 이승민은 “한참 전에는 딱 성재만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 올라가더니 이제는 막 난리가 났다”며 웃었다.

골프를 하지 않을 때 이승민은 자전거로 1시간씩 집 앞 호수를 돈다. 아무리 힘든 훈련을 하고 와도 꼭 혼자 나가 페달을 밟는다. TV 드라마에 자폐성 장애인 우영우가 나오면 피식 웃는다. 어머니 박 씨는 “자기와 비슷한 면이 보였나 보다. 책이나 영화·드라마 내용 이해를 제일 어려워했는데 요새는 조금은 이해하는 것도 같다”고 했다. 법전을 줄줄 외는 우영우처럼 이승민은 한 번 갔던 길이나 장소를 사진처럼 세세히 기억한다. 골프 코스를 한 번 돌면 어느 홀 어디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 다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이승민은 은은한 미소로 어머니 박 씨를 한참 동안 바라만 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어, 그냥 음… 엄마는 나를 잘 바라봐주고 끌고 가니까. 내가 가끔 이상하게 보여도 엄마는 계속 이해해주고 기다려주고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울컥해진 박 씨가 얼굴을 가리는 사이에도 이승민은 똑같은 미소로 엄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글·사진=양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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