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SF) 영화인 ‘터미네이터2’에는 암살로봇 T-1000이 나온다. 액체금속괴물이라 자유롭게 형태가 변하는가 하면 금속 물질을 투과하고 비슷한 질량의 물건으로 변신한다. 이런 영화 속 상상이 현실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 물리학자들이 물질에 빛을 쪼이면 도체가 반도체로, 반도체는 금속으로 자유자재로 바뀌는 ‘플로케(Floquet) 상태’ 연구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서울경제가 공동 주관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8월 수상자인 조길영(35)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 50년간 답보 상태에 빠졌던 플로케 상태를 안정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며 신소재 개발은 물론 양자 기술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다.
플로케 상태는 빛을 이용해 고체 물질의 전기적·광학적·양자역학적 특성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의 편광이나 주파수를 바꿔 하나의 물질 안에서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절연 상태와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 상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과학계에서는 열·압력 등의 방식이 아닌 빛을 물질에 쪼이면 물질 내부의 전자와 빛이 양자역학적으로 결합한 상태인 ‘플로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가설이 있었고 2013년 처음 관측된 바 있다. 이후 많은 연구자가 ‘플로케 상태’ 구현에 도전했지만 지금까지는 250펨토초(1펨토초는 1000조분의 1초) 수준을 구현하는 데 그쳤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물질에 가해지는 빛으로 인해 발생하는 열이었다. 플로케 양자 상태를 활용하려면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치 냉동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온도가 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기존 연구자들은 플로케 상태의 구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매우 강한 빛을 물질에 가했다. 조 교수는 “물질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 플로케 상태를 유지한 게 1조분의 1초가량밖에 안 됐다”며 “플로케 상태는 존재 여부만 확인하고 특성과 활용 연구가 미진했다”고 전했다.
조 교수는 “안정적으로 플로케 상태를 구현하는 게 매우 힘들다”며 “저희 연구팀은 플로케 상태를 안정적으로 구현해 기존의 지속 한계 시간을 1경 배 이상 늘려 25시간 이상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고 기염을 토했다.
조 교수팀은 이를 위해 안정적인 플로케 상태를 구현하는 새로운 실험법을 개발했다. 플로케 상태의 미세한 신호를 측정할 수 있는 초전도·그래핀 소자 기술을 활용했다. 상대적으로 세기가 약한 마이크로파를 갖고 플로케 상태를 구현해 빛으로 인한 발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연구팀은 마이크로파의 세기를 조절해 그래핀의 전자구조를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도 확인했다.
조 교수는 “세계 최초로 플로케 상태를 반영구적으로 지속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며 “앞으로 빛의 편광과 주파수 변화에 따른 플로케 상태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플로케 연구를 확장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비평형 양자 상태를 구현하는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