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과 미묘한 엇박자를 낸 튀르키예가 이번에는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열고 경제·에너지 협력 강화 등에 합의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국인 튀르키예가 대놓고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나서자 서방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대러 제재 회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물론 이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 터키 내 서방 기업 철수 등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강경론마저 대두되는 상황이다.
6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날 러시아 소치에서 약 4시간 동안 회담한 후 공동성명을 내고 양국 무역 활성화, 경제·에너지 분야의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부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에르도안 대통령이 러시아 가스 구입 비용을 루블화로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고도 덧붙였다. 양국 정상의 만남은 지난달 19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3자 회담을 연 지 3주도 채 되지 않아 이뤄졌다.
특히 이번 회담은 튀르키예가 러시아에 제재 회피 수단을 제공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방의 우려를 키운다. 기폭제는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들의 보도였다. 우크라이나 정보 당국이 러시아에서 입수한 내부 자료를 인용한 WP의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회담에서 “튀르키예에 있는 정유 공장, 터미널 등의 지분을 매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밝혔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러시아가 튀르키예의 시설을 이용해 자국 원유의 원산지를 속이는 방식으로 서방의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를 무력화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WP는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징후는 없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가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강화를 주장한 것은 사실인 만큼 서방의 불만은 치솟고 있다. 이미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면서도 대러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아 서방의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회담 직후 한 EU 관계자는 FT에 “튀르키예에 대한 우려가 역내에서 깊어지고 있다”며 “회원국들이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협력을 더 면밀하게 감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한 서방 고위 관리는 “튀르키예가 이번 회담에서 합의한 것을 실제로 이행할 경우 (서방 국가들이) 각국 기업과 은행에 튀르키예 사업 철수를 요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튀르키예가 EU의 경제·금융 시스템에 깊숙이 통합돼 있다는 점에서 이 정도 수준의 제재를 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일부 회원국의 개별 제재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인 합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만큼 일단 EU 본부를 비롯한 서방은 향후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협력 수준을 주시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