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더는 남성 리더와 달라야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프레임입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인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권명숙 인텔코리아 사장이 내세운 여성 리더십론이다 권 사장은 1988년 인텔코리아 설립 이후 최초로 선임된 여성 사장이다. 1986년 대우통신에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인텔 한국지사의 창립 멤버로 들어가며 인텔과 인연을 맺었다. 영어영문학과 출신인 권 사장은 고난도 반도체 기술을 악착같이 공부하며 인텔코리아 성장을 주도했다.
2012년 권 사장은 잠시 인텔을 떠나 삼성SDI 소형전지마케팅 상무로 근무하기 시작한다. 2015년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 권 사장은 대표이사직으로 인텔에 복귀해 8년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0명 남짓하던 인텔 한국 지사가 300여 명의 회사로 커나가는 과정을 빠짐 없이 지켜본 그야말로 ‘산증인’이다.
현재 인텔코리아에서 세계적인 중앙처리장치(CPU) 제조사인 인텔의 칩을 한국 기업에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인텔은 CPU 외에도 각종 네트워크, 메모리 반도체 등 전자 기기 내 칩과 호환을 위한 인터페이스 분야에서도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새롭게 나온 소프트웨어 인프라 등을 한국에 신속하게 정착시켜 인텔 생태계를 확대하는 작업도 권 사장의 몫이다.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에서 첨단 기술 ‘테스트베드’이자 선봉장 역할을 해온 한국 시장에서 그의 역할은 상당히 돋보인다. 인텔코리아의 연간 이윤 증가도 그의 역량을 증명한다. 매년 발행하는 인텔코리아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권 사장이 대표이사로 부임했던 해 인텔코리아의 영업이익은 130억 원대였다. 성장을 거듭한 회사는 2020년 처음 영업이익 200억 원을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223억 원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이고 탄탄한 재정 구조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권 사장은 8년째 인텔코리아의 ‘여성’ 수장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늘 업계의 이슈가 되고 있다. 국내 IT 하드웨어 생태계에서는 여성 사장이 선봉에 서서 수년째 회사를 탄탄하게 키워낸 경우가 상당히 드물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국민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심사하는 멘토로 참가했던 배경도 권 사장의 커리어가 주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업계 관계자들은 권 사장에게 여성 리더만이 가질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를 궁금해 한다. 권 사장은 이 질문은 편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엄마 리더십, 언니 리더십 같은 여성성에 갇힌 키워드보다는 ‘권명숙’이라는 주체가 생각하는 개성 있는 리더십이 훨씬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남성의 리더십과 구분되는 여성의 리더십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얘기다.
권 사장은 “저는 여성이 직면한 유리 천장을 깨야 했던 IT 1세대였던 것은 맞다”면서도 “지금은 성별을 논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 사장은 △포용성 △차별화 △소통 △실행력 등 4가지 키워드를 늘 마음에 새기면서 경영에 임한다고 전했다.
권 사장은 예전의 성공 방식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경우를 융합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그는 훌륭한 직원들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이들에게 들은 내용을 실행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사장은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5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가 한국 임직원과 소통의 시간을 가졌던 것을 보고 ‘소통과 실행 리더십’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겔싱어 CEO는 방한 기간 동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삼성전자 핵심 경영진을 만나 큰 화제가 됐다. 그는 주요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만남만큼 인텔코리아 임직원과의 간담회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지난해 1월 CEO 선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 직원들을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텔코리아 임직원을 만나 인텔의 방향성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경청하고 솔직 담백하게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권 사장은 “직원들 누구에게나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너무나 진솔한 소통이 있었다”며 “겔싱어 CEO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경영 철학을 공유하면서 경영에 최우선적으로 반영하려는 모습을 봤다”고 밝혔다.
또한 인텔 본사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임원 교육과 토론을 통해 소통과 리더의 역할을 되뇌이게 된다고 전했다.
그는 “임원 교육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원들의 말을 잘 듣고 있다고 대답하지만 막상 사업 계획에는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직원들의 뜻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의견을 실행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미래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권 사장은 최근 업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MZ 세대’와의 소통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MZ 세대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최신 트렌드와 남과 다른 이색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수직적인 직장 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견과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권 사장은 인텔 특유의 ‘수평 문화’가 MZ 세대와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인텔은 1968년 설립 당시부터 ‘개방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 왔다. 사장부터 갓 입사한 직원들까지 똑같은 책상을 사용했고 보고할 내용이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면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를 이어왔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CPU 시장에서 80% 점유율이 넘는 독보적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다.
권 사장은 이런 문화를 인텔코리아에도 고스란히 적용했다. 실제 서울 여의도와 삼성동에 마련된 인텔코리아 사무실에는 사장실은 물론 개인 책상조차 없다. 출근을 하면 비어 있는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수시로 직원들과 대화한다. 내부에서 직원들과 대화할 때는 직책을 생략한다. 직원들은 권 사장을 ‘MS 권(Kwon)’이라고 부른다.
이런 자유로운 문화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더욱 활성화됐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른바 ‘하이브리드(혼합)’ 근무 형태로 변하면서 직원들의 유연성이 한층 올라간 것이다.
권 사장을 포함한 인텔코리아의 핵심 경영진도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재택 근무를 하면서 업무를 진행했다. 권 사장은 “작은 것일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인텔의 문화가 MZ 세대와 소통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신입 사원에게 상사의 보조 업무만을 맡기지 않는다는 권 사장의 원칙도 있다. 권 사장은 “모든 임직원에게 개인의 고유 업무 분야와 권한이 있다”며 “업무 복잡도는 낮더라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본인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권 사장은 무조건적 자유를 지향하지 않는다. 개인의 목표와 성과는 철저하게 데이터만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또 자율적인 업무가 주어지는 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엄격하다.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자율적인 업무 문화를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게 권 사장 설명이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율과 권한에 적응하기 어려운 신입 사원을 관리하는 것도 대표이사의 몫이다.
권 사장은 “경력 사원의 경우 자율적인 업무가 주어지면 적응이 빠른데 새롭게 들어온 직원들은 당황하기도 한다”며 “이들의 업무를 완충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권 사장은 미래에 리더가 되고 싶은 꿈나무에게 ‘도전’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했다. 권 사장은 리더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틀을 깨면서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도전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도전에 실패했을 경우 빠르게 회복하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권 사장은 “도전을 하면 누구나 좌절하게 돼 있다”면서 “실패를 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보면서 제자리로 빨리 돌아오는 것이 다음을 위해 상당히 중요하다”고 전했다.
권명숙 사장은
△1964년 서울 △1986년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대우통신 입사 △1988년 인텔코리아 입사 △1999년 인텔코리아 마케팅 담당 상무 △2005년 인텔코리아 영업 담당 전무 △2012년 삼성SDI 소형전지 마케팅 담당 상무 △2015년 인텔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