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하철 역사에는 계단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 강남역에서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50개 이상의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오래된 역사들은 100계단 이상 오르내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이렇게 불편하니 너도나도 자동차를 몰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들 탄소 배출이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기후변화 대응 전략을 담은 책 ‘기후담판’을 출간한 정내권(68·사진) 전 기후변화대사는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탈탄소를 위해서는 기존의 대중교통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대한민국 기후변화 대응 역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되는 정 전 대사는 유엔 사무총장 기후변화 수석자문관,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환경개발국장, 외교부 초대 과학환경과장, 환경심의관, 국가기후환경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 재단’ 이사와 러시아 ‘글로벌 에너지 프라이즈’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녹색 성장’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도 그다.
정 전 대사는 기후변화 대응책의 하나로 교통 체계, 그중에서도 지하철·기차와 같은 대중교통 체계의 혁신을 꼽는다. 남녀노소, 장애인·비장애인 모두 편하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을 만들면 굳이 자동차를 끌고 나오지 않을 것이고 탄소 배출량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일본 도쿄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자동차를 끌고 출퇴근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며 “우리나라도 시민들이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편리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전 대사가 제시하는 대안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에스컬레이터를 놓거나 지하철 급행 노선 확대와 같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급행 노선을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정차역만 복선으로 만들면 된다”며 “이런 것들은 단시간 내 비용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대사는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20년 넘게 기후변화 대응에 나섰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에너지와 산업 분야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현재 탄소 배출 기준은 생산량, 즉 국내총생산(GDP)이다. 당연히 ‘온실가스 감출=GDP 감소’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는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 탄소 배출의 책임을 국가나 기업에만 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소비가 없으면 생산도 없고 따라서 탄소 배출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소비자도 탄소 배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죠.” 탄소 비용의 시장가격 반영, 즉 ‘탄소세’를 간접세의 형태로 부과해 개인도 온실가스 증가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가 내세우는 ‘기후 경제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세금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텐데 어느 정치인인들 나설까.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 전 대사는 ‘세금 완화’를 제안한다. 탄소세 부담이 증가한 만큼 소득세나 법인세를 깎아주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된다면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 뿐 아니라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성장과 고용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며 “세금 총액은 늘어나지 않기에 조세 저항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탄소세 부과는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정 전 대사가 대안으로 환경 운동의 방향 전환을 강조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전기료를 낼 때 자발적으로 어느 정도 더 내고 이렇게 모인 자금을 신재생에너지 확산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환경 운동이 ‘반대’에 초점을 맞춰 진행했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며 “내가 먼저 탄소 비용을 지불하고 이를 기후변화 대응에 사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