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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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글로 삶을 배우는 것과 삶에서 말을 빚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정했다지만, 그륵은 꽤나 보편적이다. 강원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두루 그륵이라는 방언을 쓴다. 전국의 그륵이 서울의 그릇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륵은 그릇을 채울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몸의 언어이다. 그릇의 발음은 다소곳하고 그륵의 발음은 힘차다. 그릇은 입심으로 살고, 그륵은 밥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릇들이 그륵을 만나러 가는 한가위다. 교양의 가면을 벗고, 몸과 맘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명절이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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