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오늘]미군 38선 이남 한반도에 진주하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945년 9월 8일






1945년 8월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6일에는 히로시마에 리틀보이(Little Boy)가, 9일에는 나가사키에 팻맨(Fat Man)이 떨어졌다. 이로써 일본은 싸울 힘을 잃어버렸고, 한반도에는 힘의 공백이 예견됐다.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과 더불어 워싱턴의 움직임도 급박해졌다. 8월 11일 저녁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24군단 하지(John R. Hodge) 중장에게 한반도에 신속 진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왜 하지였을까? 이유는 둘이었다. 미군 가운데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부대가 오키나와에 있는 제10군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10군 사령관 스틸웰(Joseph W. Stilwell)을 택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그는 주 중국 미 군사고문단장 시절에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군대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스틸웰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트루먼은 스틸웰의 부하인 하지를 선택했다. 하지는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고도의 정무적 감각이 필요한 군정 사령관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 주둔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8월 19일이었다. 하지의 부대는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총독부 업무를 인수하며,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을 통치하고 감시하는 일도 해야 했다. 워싱턴의 명령은 너무 개괄적이었고, 군정 내에 한국 전문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하지의 군정은 준비되지 않은 조직이었다. 하지의 군정은 미국의 시각에서 작전의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봤다. 한국인의 자치 요구는 종종 불순한 시도로 곡해됐다. 미소 냉전의 심화로 이러한 관성은 점점 더 강화됐다. 1948년에 발생한 제주 4·3은 그 상황 속에서 잉태된 비극적 결과였다. 그래서 감히 상상해본다. 하지 대신에 스틸웰이 부임했어도 결과가 같았을까? 혹시 하지와 그의 참모들이 좀 더 신중한 자세로 군정을 시행했어도, 결과가 같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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