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와 전기차에 이어 바이오 산업에서도 자국 중심의 생산 체제를 갖추겠다고 나서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특히 세계 선두권 바이오시밀러 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와 셀트리온(068270) 등은 적기에 미국 투자를 단행하지 않을 경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미국은 세계 첨단 의약품 수요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세계 1위 시장일 뿐만 아니라 한국 바이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업계의 최대 발주국이기도 하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2일(현지 시간) 바이오 분야의 미국 내 생산을 골자로 한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이 행정명령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미국에서 발명된 모든 것을 미국에서 만들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의약품 생산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중심의 첨단 의약품 공급망을 새롭게 구축한다는 의도다. 고임금 일자리를 추가 창출하는 한편 물가 상승세 완화에도 이번 행정명령이 기여할 것이라고 백악관은 설명했다. 백악관은 14일 이번 행정명령에 따른 구체적인 실행 내용을 어떻게 정할지를 논의한 뒤 180일 이내에 바이오 자국 생산에 대한 구체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바이오 생산을 확대하고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것”이라며 “미국은 과거 생명공학 분야의 해외 생산을 허용해왔지만 중국의 첨단 바이오 제조 기반 시설에 대한 의존도에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미국 정부가 구체적인 방안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K바이오에 끼치는 영향의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미 정부가 외국에 대한 의약품 위탁 생산 발주를 제한하고 첨단 의약품에 대해 미국 내 생산을 유도할 경우 CDMO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 등은 서둘러 미국 내 생산 기지를 갖춰야 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올 7월 말 기준 얀센·머크·GSK·일라이릴리·노바티스 등 글로벌 빅파마들과 맺은 계약만도 7건, 총 8201억 원 규모에 이른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전기차 사례에서 보듯 미국 내 생산 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하지 않을 경우 불시에 불이익이 현실화할 수 있다”며 “미 행정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입법이 아닌 행정명령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무엇보다도 정보 수집과 선제적 대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현지에 생산 시설을 건설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원료 수급 등이 또 다른 장벽이 될 수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한국 CDMO 기업들은 고민이 많을 것”이라며 “(미국 생산을 결정한다고 해도) 미 식품의약국(FDA)이 중국 원료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들게 되면 원료 공급망 다변화까지 필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내 주요 바이오 업체들 중 미국 내 CDMO 생산 시설을 갖춘 곳은 롯데바이오로직스와 차바이오텍(085660)뿐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이 분야 진출을 선언하면서 뉴욕주 시러큐스에 있는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바이오 의약품 공장(연산 3만 5000ℓ)을 인수했다. 차바이오텍은 미국 자회사인 마티카바이오테크놀로지를 통해 올해 5월 텍사스에 바이오 의약품 생산 기지를 완공했지만 규모는 미미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워싱턴·텍사스·캘리포니아·노스캐롤라이나 등 4곳을 대상으로 미국 생산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이다. 셀트리온은 현지 생산 시설이 없다.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중복 투자 우려가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인천 송도 제1캠퍼스 4공장(연산 25만 6000ℓ)을 올해 완공해 내년부터 연산 총 62만 ℓ 체제를 갖추게 된다. 여기에 추가로 제2캠퍼스를 짓기 위해 최근 송도 토지 매입 계약을 한 상태다. 셀트리온은 내년 송도 3공장(6만 ℓ)이 가동하면 연산 25만 ℓ 체제를 갖추게 된다. 롯데바이오로직스도 국내에 대형 생산 기지를 지을 방침이다. 미국의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추가로 설립하면 수주량이 모자랄 경우 중복 투자 논란을 피하기 힘들다.
다만 이번 미국의 조치가 중국 견제에 집중될 경우 한국 업계가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한 대기업 계열 제약·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이번 명령이 미국에서 쓰이는 약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취지라면 미국 외 위탁 생산 기업들인 삼성바이오로직스·론자·베링거인겔하임·캐털런트·써모피셔·우시바이오로직스·후지필름 등에 직접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최종 결론이 중국 기업 견제에 집중된다면 한국 기업들은 위탁 규모가 늘어나는 반사이익을 볼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