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또는 일과 쉼의 균형인 ‘워라밸’에서 사실 핵심은 ‘라’다. 일(워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자신만의 ‘라이프’도 돌봐야 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잘 쉬고 잘 놀 수 있는지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황유민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프로 골퍼이니 그에게 골프는 분명히 일인데 쉴 때도 일을 생각하고 일과 관련한 활동을 하니 말이다.
황유민은 쉴 때는 가끔 ‘엄마 휴대폰’에 있는 지뢰 찾기 게임을 하지만 그다지 열심은 아니다.(MMORPG나 FPS, 메타버스 게임도 아니고 윈도우 시절의 바로 그 게임 지뢰 찾기다!)
사실상 유일한 취미는 유튜브 영상 보기. 그런데 구독하는 채널도 없고 본인 계정조차 없다. 그저 골프 스윙 영상에만 빠져들 뿐이다. 자신의 영상도 보긴 하지만 무엇보다 좋아하는 선수들의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배울 점을 찾거나 순수한 팬심으로 감탄하곤 한다. 심지어 대학에서 전공도 골프(한국체대 체육학과 골프부 1학년)다. ‘골프밖에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헤헤 웃는 이 천진난만한 특급 유망주를 지금부터 알아가 보자.
280야드 장타의 본적은 주차장과 놀이터?
장타 치는 유망주는 많지만 황유민은 좀 더 멀리 친다. 163㎝의 크지 않은 키와 약해 보이는 몸으로 250야드 드라이버 샷을 쉽게 날리니 ‘임팩트’가 훨씬 강하다. 내리막이 좀 있는 홀에서는 280야드도 찍힌다. 8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자 골프 국가대항전 시몬느 아시아퍼시픽컵에서도 황유민은 ‘탄성 유발자’였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언니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했다.
“원래는 거리가 안 나가는 편이었다”는 황유민은 어떻게 소문난 장타자가 됐을까. 안양 신성고 1학년 때로 돌아가야 한다. 거리가 부족해서 작정하고 순발력 기르는 운동을 많이 했다는 황유민은 빈 스윙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돌아봤다. “매일 밤 9시만 되면 가벼운 걸 들고 나가서 30분씩 엄청 세게 휘둘렀어요. 주로 집 앞 주차장이나 놀이터 같이 사람 없는 곳에서요.”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인도 있었을 것 같다는 얘기에 황유민은 “일단 저는 거리를 어떻게든 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신경을 못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스피드 자체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 점프 운동도 많이 했다. 박스를 쌓아 놓고 제자리 점프로 맨 위에 올라가는 운동. 황유민은 1m 높이를 가뿐히 오른다. 이 운동을 통해 지면을 미는 힘과 탄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국가대표 생활을 하는 동안 선수촌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체계적으로 한 것도 도움이 됐다. 몸이 좋아지니까 헤드 스피드도 시속 3마일 정도 늘어 드라이버 샷이 10야드 더 멀리 나가게 됐다는 설명. 선수촌에서 체지방을 측정해봤더니 10%로 국가대표 동료들 중 가장 낮았다. 황유민은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2년 동안 달았고 7월 프로로 전향했다.
다양한 구질 연습으로 초고속 우승
시원한 롱 게임이 바탕인 단단한 경기력으로 황유민은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정규 투어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준우승, 지난해 한국여자오픈 공동 4위 등의 성적을 냈다. 정규 투어 정식 데뷔도 하기 전에 눈도장을 단단히 찍은 것이다. NH투자증권 대회에서는 마지막 홀 두 번째 샷 실수만 아니었다면 아마추어 신분으로 우승하는 대기록과 함께 내년 정규 투어 시드를 바로 확보할 수 있었다.
황유민은 그러나 아쉬움을 오래 가져가지 않았다. 7월 KLPGA 3부 무대인 점프 투어 10차전에서 준우승한 뒤 11·12차전에서 2주 연속 우승에 성공한 것이다. KLPGA 준회원 입회 한 달 만이자 3개 대회 출전 만에 첫 우승을 해냈다.
“10차전에서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준우승하면서 ‘아, 우승하려면 정말 잘 쳐야 하는구나’ 싶었어요. 바람이 많을 거라고 해서 바람을 덜 타게 탄도 자체를 많이 낮추고 바람에 유리한 구질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는데 다음 대회부터 효과가 나오더라고요.”
황유민은 이른바 ‘기술 샷’ 연마가 취미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다양한 샷 구사가 필수라는 생각에서다. 요즘은 ‘공을 몰아가는 능력’을 키우는 데 빠져있다. “샷이 잘 안 될 때는 어떻게든 공을 살려서 플레이 해야 하는 거니까 공을 계속 코스 안으로 몰아가는 걸 잘하기 위한 연습이에요.”
이러니 골프가 지겨울 틈이 없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불의의 탈락으로 잠깐 힘든 시간을 겪기는 했지만 황유민은 이내 훌훌 털고 일어서 일이자 취미인 골프에 다시 빠져들었다. 내년 정규 투어 공식 데뷔를 상상하며 2부 무대인 드림 투어를 부지런히 누비고 있다.
와, 저 선수 ‘깡다구’ 있네
황유민이 준우승한 NH투자증권 대회는 지하철 기흥역이 바로 앞인 수원CC에서 열려 전통적으로 갤러리가 많이 몰리는 대회다. 게다가 국내 여자 골프 간판 박민지와 같은 조에서 우승 경쟁을 벌였으니 황유민은 매 홀 구름 관중을 등 뒤에 두고 부담스러운 경기를 해야 했다. 갤러리 반응 중에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는 물음에 그는 수줍게 답했다. “예…‘예뻐요’라는 말이요.”
기분 좋은 말이었지만 진짜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와, 저 선수 ‘깡다구’ 있게 치네’라는 말을 꼭 듣고 싶어요.” 황유민은 “어려운 상황이나 남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오히려 확률을 높게 생각하고 시도를 하는 편”이라며 “남들보다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황유민은 인덕원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골프 대회에 나갔다. 원래 100개 치는 실력이었는데 첫 대회에서 86타를 친 뒤 그 길로 “엄마, 아빠 나 골프 할래”라고 선언하고는 전문 체육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취미로 수영과 스피드스케이팅도 했지만 골프의 재미에 비할 바 아니었다.
글러브 든 아빠는 훈련 도우미
황유민은 올해 쇼트 게임 실력이 부쩍 늘었다. “원래 웨지를 안 좋아했는데 올 들어 좋아하게 됐다”는 설명. 원하는 지점에 공을 떨어뜨려 핀에 붙였을 때 느끼는 짜릿함을 점프 투어 우승 때도 심심찮게 느꼈다고 한다.
‘훈련 도우미’ 아빠 덕분이었다. 금융결제원 전산 부서에서 근무하는 아버지 황영훈 씨는 골프는 잘 모르지만 딸의 뒷바라지엔 누구보다 ‘진심’이다. 야구 글러브를 끼고 딸이 웨지로 띄우는 공을 열심히 받았다. “아빠가 글러브를 높이 들고 있으면 거길 보고 정확히 넣는 연습을 했어요. 글러브 위치를 바꾸면 또 거길 겨냥해서 보내고요.” 쇼트 게임 코치인 이선화 프로가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의 연습을 참고 삼아 추천한 훈련법이라고 한다. 황유민은 “한 번 하면 1시간은 금방 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다”면서 “다만 아빠가 힘들어 하시는 게 눈에 보였다”며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애써 웃었다. 아빠의 도움이 결정적인 이 훈련 덕에 황유민은 공의 포물선을 더 잘 느끼게 됐다고 한다. 올 3월 미국 오거스타 여자 아마추어 대회 때만 해도 뒤땅이 많이 나왔는데 최근 실전에서는 공 컨택트가 확실히 깔끔하게 잘 나온다는 설명이다. 밤이면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찾아 흙바닥을 30분씩 치는 연습을 할 때도 늘 아빠를 동반했다.
황유민은 요즘도 골프백에 웨지를 5개(48·52·60도 웨지와 56도짜리 2개)나 갖고 다니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공략을 연습한다. 이와 함께 매트 위에 쇠로 된 자를 놓고 퍼트의 스타트와 라인을 확인하는 연습은 집에서 하루 20~30분씩 반드시 한다.
“제겐 PGA 투어 선수 쇼플리가 연예인”
좋아하는 연예인도 딱히 없는 황유민은 “제겐 잰더 쇼플리가 우상이자 연예인”이라고 했다. 저스틴 토머스, 캐머런 스미스도 좋아하지만 쇼플리를 특히 광적으로 좋아한다. 올해 그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할 때 새벽 3시에 일어나 중계를 챙겨봤다. 유튜브에 올라온 쇼플리 영상은 빠짐없이 다 봤다고. “스윙 템포가 말도 안 되게 일정해서 보고 있으면 정말….” 황유민은 “토머스는 웨지 샷 플레이가, 스미스는 10초 가까이 퍼트 라인을 살펴보는 루틴이 정말 인상적”이라며 “무조건 따라할 수는 없고 저한테 필요한 부분들을 잘 살펴서 습득하려 한다”고 했다.
아시아 아마추어 랭킹 1위와 세계 아마 랭킹 3위를 찍은 황유민은 “우승 많이 해서 영구 시드 받은 뒤 나가고 싶은 대회를 골라서 나가는 게 꿈”이라며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서 원하는 LPGA 투어 대회에 나가는 것도 이뤄지면 좋겠다”고 했다.
“시원시원한 골프를 하는 선수, 업 앤 다운이 있겠지만 결국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황유민은 올 시즌 뒤엔 운전면허부터 딸 것이라고 했다. “음악 빵빵하게 틀고 멋있게 운전해보고 싶어요.” 한 손에는 KLPGA 정규 투어 출전권을 따면 주는 배지를, 다른 한 손에는 빛나는 운전면허를 쥐고 있을 황유민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PROFILE
출생: 2003년 | 프로 데뷔: 2022년 | 소속: 롯데
주요 경력:
2020년 KLPGA 휴엔케어오픈 26위, 경기도협회장배 우승
2021년 한국여자오픈 4위, 강민구배 우승, 빛고을중흥배 우승
2022년 KLPGA NH투자증권 챔피언십 2위, 점프 투어 11·12차전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