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오늘]이프르강에서 참호전 시작되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914년 10월 19일






1914년 10월 19일 프랑스와 가까운 벨기에 서부의 이프르(Ieper) 강이 온통 붉게 변했다. 이날부터 한 달 남짓 지속된 전투에서 4만 7000명 이상의 독일군이 희생됐다. 연합군의 희생도 엄청났다. 5만 명이 넘는 영국군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프랑스군도 이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벨기에 장병도 2만 명 이상 희생됐다. 그에 비해 전과는 허무했다. 그 어느 쪽도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강 건너에서 발사되는 기관총탄 세례에 양측의 장병들이 가을 낙엽처럼 쓰러졌다.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지휘관들은 돌격만 외쳤다. 과거의 전쟁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령의 장성들이 보여준 것은 전략과 전술의 지체뿐이었다. 이프르강에서 시작된 참호전은 곧 일차대전의 대명사가 됐다. 이 방식은 독일에 특히 불리했다.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동전만이 독일의 살 길이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빛의 속도로 격파한 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제압하겠다는 슐리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개전 초의 애국주의적 열정도 사라졌다. 물신적 자본주의에 찌든 유럽을 전쟁이 정화시킬 것이라는 기대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년들의 결연한 의지는 포격으로 엉망이 된 동료의 시신 앞에서 공포감으로 변했다. 병사들은 엽서와 편지로 전쟁의 참상을 알렸지만, 후방의 정치인과 장성들은 승리는 시간문제라며 호언만 거듭했다. 이런 부조리를 고발한 것이 독일 작가 레마르크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는 고위 장성들의 무책임한 상황 판단을 비꼬는 제목이다. 어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단 말인가? 이프르강의 첫 전투에서 수만 개의 푸른 별이 사라지고, 가족들의 눈물이 강을 이뤘는데 말이다. 이 부조리를 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보고 있다. 역사는 진정 반복되는 걸까? 이처럼 슬프고 어처구니없게?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