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물가 40년래 최고인데 감세 '헛발질'… 결국 英 역사상 최단기간 총리 불명예 퇴진





영국 역사상 최단기간 총리라는 오명을 쓰게 된 리즈 트러스 총리의 사퇴 기자회견은 짤막했다. 그는 20일(현지 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경제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에 취임했다”며 “영국은 낮은 경제성장에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를 바꾸라는 위임을 받아 선출됐지만 보수당이 나를 선출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왕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고 다음 총리가 선출될 때까지 총리로 남겠다”고 덧붙였다.



트러스 총리는 결국 현 시장 상황과 정 반대되는 경제정책을 제시하며 부메랑을 맞았다. 지난달 6일 취임한 트러스 총리는 이어 9월 23일 야심찬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대대적인 감세와 공급부문 개혁으로 영국의 경제성장을 다시 이끌겠다는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반세기만의 최대 규모인 450억파운드의 감세안을 발표하면서도 재원 대책은 제시하지 않아 시장으로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달러파운드 환율은 파운드 당 1.1달러대가 무너지며 달러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패리티’에 임박하기도 했고 장기물 국채금리가 급등하기도 했다. 이에 레버리지를 일으켜 영국 국채 투자를 했던 영국 연기금들이 잇딴 ‘마진콜’에 직면했고 급기야 영란은행(BOE)이 지난달 28일 긴급 시장개입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향후 2주간 장기국채 650억파운드어치를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물가상승률이 40년래 최고치를 기록해 가파르게 금리를 올려야 하는 BOE가 오히려 장기물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를 단행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진 셈이다.


이후 부자감세를 철회하는 등 첫 정책유턴을 지난 3일 단행했다. 소득세 최고세율을 45%로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14일에는 법인세율을 예정대로 인상하기로 하는 등 두 번째 정책 유턴을 하며 자리를 사수했다. 이날 이번 경제정책을 주도한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경질하고 신임 재무장관으로 제리미 헌트 전 외무장관을 앉혔다. 헌트 장관은 대대적 감세 계획을 취소하고 되레 증세 계획과 정부 지출 축소 계획을 밝혀 시장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트러스 총리는 전날까지만 해도 의회에서 “나는 싸우는 사람(fighter)이지 그만두는 사람(quitter)이 아니다”라고 정면 돌파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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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수당 내에서 ‘트러스 총리로는 보수당 전체가 위험하다’는 정치적인 우려가 고조되면서 결국 자리를 내놓게 됐다. 실제 트러스 총리는 20일 집권 보수당 경선을 주관하는 1922위원회의 그레이엄 브래디 위원장과 만난 후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날 만남은 트러스 총리가 요청해서 총리 집무실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브래디 위원장은 당내 트러스 총리 불가론에 대한 분위기를 직접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당내에서는 트러스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최고조에 달했다. 트러스 총리의 정치적 동지로 평가되는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이 19일 돌연 사표를 내고 떠나기도 했다. 브레이버먼 장관은 이날 자신이 공문서를 개인 e메일 계정으로 발송해 규정을 위반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정부 방향이 우려된다”며 국정 운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일간 가디언지는 “(브레이버먼 장관이 밝힌) 규정 위반은 내각에서 비일비재한 일로, 자진 사퇴를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트러스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보수당 의원도 13명에 달했다.

이제 관심은 후임으로 쏠리고 있다. 지난 여름처럼 보수당 내 경선을 거쳐 새 총리를 선출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국민 피로도가 올라간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보수당은 대표 선출 규정을 바꿔서 단일 후보를 올리려 할 것으로 보인다. 후임으로는 트러스 총리와 경합했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 원내 경선에서 3위를 차지한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 벤 월러스 국방부장관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버티던 트러스 총리의 사퇴로 시장은 반등했다. 영국 10년물 국채수익률은 10bp(1bp=0.01%포인트) 내린 3.78%에 거래됐고 달러파운드 환율도 0.5% 상승한 파운드 당 1.1278달러에 거래됐다.


이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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