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가 무서워 울부짖는 아이를 온 몸으로 붙잡고 혈관을 찌릅니다. 2~3일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아직도 주사를 놓을 때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떨리고 식은 땀이 흐르죠. 중증 희귀질환 치료제의 접근성을 개선해 주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을 믿었는데, 언제까지 이 고통을 참고 있어야 하나요. "
이달 13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정감사에 출석한 혈우병 환아의 어머니 김경아씨는 "4주에 1번만 피하로 투여할 수 있는 주사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해 달라"며 이 같이 호소했다. 김씨의 아들은 16년째 A형 혈우병을 앓고 있다.
혈우병은 몸의 X염색체에 위치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혈액 안의 응고인자(피를 굳게 하는 물질)가 부족해 발생하는 출혈성 질환이다. 1만 명당 1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작은 상처가 나도 일반인보다 피가 멈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혈이 되지 않아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혈우병은 부족한 응고인자의 종류에 따라 크게 A형과 B형 2종류로 나뉜다. 제8번 응고인자가 부족해 발생하는 A형이 전체 혈우병의 약 80%를, 제9번 응고인자가 부족해 발생하는 B형이 나머지 20%를 차지한다고 알려졌다. 국내 유병 현황도 비슷하다. 혈우재단백서에 따르면 2019년 국내에서 A형 혈우병으로 등록된 환자는 1746명으로, 전체 혈우병 환자(2509명)의 69.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응고인자 보충하며 평생 관리해야…내성 생기면 치료효과 뚝
A형과 B형 혈우병의 임상적 증상은 비슷하지만 각각의 응고인자가 부족한 정도에 따라 중증도가 달라진다. 아직까지 혈우병을 완치할 수 있는 치료법은 없기에 현재로선 혈우병 유형에 따라 부족한 응고인자를 보충해줌으로써 체내 혈액응고 기능이 유지되도록 관리하는 게 최선이다. 대부분의 A형 혈우병 환자들은 일주일에 2~3회 정맥으로 혈액응고인자를 포함한 주사제를 투여해 왔다. 문제는 지혈이 잘 되지 않는 질환의 특성상 정맥혈관에 주사를 놓기 쉽지 않다는 것. 병을 앓은 기간이 오래된 환자일수록 한 번에 혈관주사를 성공하지 못해 수 차례 혈관을 찔러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설상가상 응고인자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주입한 환자 중 일부에서는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치료제에 내성이 생겨 약물투여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항체 환자로 구분하고 있다. 항체 환자들에게는 기존에 쓰던 응고인자 제제 대신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혈액응고인자를 주입해 면역관용을 유도해 항체를 제거하는 ‘면역관용요법’ 등이 시도된다.
◇ 한달에 1번 투여하는 피하주사제 등장…내성 문제도 해결
신약개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반적인 응고인자 제제보다 반감기를 늘린 치료제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평생 질환을 관리해야 하는 혈우병 환자들에게는 투약 횟수를 줄이고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치료제는 ‘삶의 희망’이다. 기존 치료제와 전혀 다른 기전으로 작용하는 획기적인 신약도 등장했다. 최근 국정감사를 비롯해 지난 2년간 수차례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했던 피하주사형 혈우병 치료제 '헴리브라(성분명 에미시주맙)'다. 로슈의 자회사인 일본 주가이제약이 개발했다. 항체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A형 혈우병에게 투여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다. 제9번 인자와 제10번 인자를 결합한 이중특이항체를 활용해 제8번 인자의 직접 주입을 회피할 뿐 아니라 내성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기존에 출시된 혈우병 예방요법제가 전부 일주일에 2~3회씩 투여하는 정맥주사제였던 것과 달리, 주 1회부터 최대 4주 간격으로 투여주기를 늘렸다. 특히 피하주사(SC) 제형으로 개발되어 투약 편의성도 대폭 높아졌다.
◇ 2019년 국내 허가 받았는데…2년 넘게 비항체 환자는 보험 적용 제외
미국식품의약국(FDA)은 2017년 11월 헴리브라를 A형 혈우병 환자의 예방요법제로 허가했다. 국내에서는 JW중외제약(001060)이 국내 독점 판권을 확보해 2019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허가를 받았다. 2020년 5월부터는 건강보험 급여도 적용됐다. 다만 적용 대상을 항체 환자로 제한했다. 혈우재단백서에 따르면 2019년 A형 혈우병으로 등록된 1746명 중 비항체 환자가 1589명(91.0%)으로 집계됐다. A형 혈우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항체 환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혈관이 약하고 통증에 취약한 소아 환자와 부모들 사이에서 급여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는 2018년부터 비항체 환자에 대한 헴리브라의 급여 적용이 이뤄졌다. 국내의 경우 2020년 7월 비항체 환자에 대한 급여확대가 신청됐다.
하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3차례 분과위원회를 열었을 뿐 2년이 지나도록 급여 논의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약제급여평가위원회가 언제 열릴지조차 기약이 없다. 한해 2억 원이 넘는 치료비용이 급여 확대의 허들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철주 세브란스병원 소아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전 세계 혈우병 치료 트렌드가 헴리브라와 같은 비응고인자 제제로 바뀌는 추세”라며 "출혈 예방 효과가 뛰어나 기존 약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 관리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