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엔데믹에 일어난 비극

손철 시그널부장

이태원 참사서 또 드러난 안전불감

여전한 '후진적 시스템' 현실 직시

갈등 아닌 통합하는 모습 보일 때

상처 보듬고 다시 나아갈 힘 생겨





코로나19 팬데믹의 고통과 비극이 3년째 계속되면서 아물어가던 상처와 아픔이 거대한 참사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사고 소식을 맨 처음 뉴스가 아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날 것 그대로 접했을 때 ‘장난하나’ 싶은 생각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하는 불길함에 알아보니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피해자 숫자가 발표될 때까지 “별 일이 아닐 것”으로 믿으며,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120명. 이태원 참사 사망자 수를 속보로 처음 마주하던 순간 또 한번 눈을 의심했다. 120명은 ‘오보가 틀림없다’고 여기던 혼돈의 시간이 30초쯤 지나자 곳곳에서 같은 뉴스가 타전됐다. 20년을 온갖 충격적 뉴스와 살아왔지만 뉴스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낀 두 번째 참담함에 몸서리치며 휴대폰을 닫았다. 부정하려 애썼던 초유의 대참사는 노트북을 다시 켰을 때 더 가슴 아픈 숫자와 사실들을 드러냈다. 기자의 본분을 더는 피할 수 없게 했다.

3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엔데믹 상황에 맞는 대형 이벤트를 정부가 어떻게 이처럼 허술하게 준비하고 대비가 없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행정부처 장관은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라며 사태 파악조차 안 되는 발언으로 150여 명의 죽음을 대했고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될 수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밝혀 책임을 피한다는 인상을 줬다.



언론 역시 참사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불과 3주 전 서울 여의도에 100만 명 넘는 시민이 몰려 교각과 도로에서 아찔한 순간들이 적지 않았지만 행사 이후 산을 이룬 쓰레기만 꼬집었지 정작 더 중요한 안전에 소홀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없는 핼러윈을 맞아 수만 명의 젊은이가 이태원에 모일 것이 예견됐지만 그들의 통행이 원활할지 등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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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다시는 이처럼 황망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게 ‘사후약방문’이라도 제대로 써야겠지만 이태원 참사에 따른 국민적 스트레스와 외상 후 장애는 막막했던 ‘코로나 블루’와 겹쳐 세월호 참사 당시보다 작지는 않을 듯 하다. 정부가 사고 수습에 총력을 다하고 불의의 사고로 숨진 희생자와 유가족을 지원하면서도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이겨낼 해법을 찾는 데 헌신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영국 BBC가 팬데믹 국면에 “실패를 인정하자”며 제안한 ‘비극적 낙관주의’는 주목할 만하다. 비극적 낙관주의는 심리학자이자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빅토르 프랑클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가 창안했는데 BBC는 이를 “희망과 의미에 삶의 중심을 두면서도 상실과 아픔,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안전 불감증과 행정력 부재 등 여전히 후진적인 시스템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이태원 참사를 극복해낼 동력이 생긴다는 의미로 읽힌다. 무엇보다 여야 정치권이 8년 전 세월호 참사에 온갖 책임자 처벌과 경제·사회적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별로 나아진 것 없는 현실을 겸허히 받들며 참사를 수습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또 정부와 정치권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눈앞의 정치적 이득에 급급해 이태원 참사를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쟁의 대상으로 삼거나 이용하려 한다면 결코 역사적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의 깊은 상처를 보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면 많은 시간과 함께 통합을 향한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인 비극적 사건들을 우리가 치유하고 잘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태원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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