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골프 골프일반

‘100%, 101%의 골퍼’ 이민지





열아홉 살이던 2015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데뷔한 호주 교포선수 이민지는 2020년까지 여섯 시즌 동안 5승을 올렸다. 성공적인 투어 생활이었다. 2021년부터의 성적은 ‘성공적’이라는 말로는 많이 부족하다. 2021년 7월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으로 ‘메이저 퀸’ 타이틀을 처음 얻더니 1년도 지나지 않은 올 6월 최고 메이저 대회인 US 여자오픈마저 제패했다. 여자 골프 사상 가장 많은 1000만 달러(약 125억 원) 총상금이 걸린 대회였다.



올 시즌 LPGA 투어 상금 1위와 메이저 성적만 합산한 안니카 메이저 어워드 포인트 1위가 모두 이민지다. 올해의 선수 포인트에서는 최근 리디아 고(뉴질랜드)에게 역전을 허용하고 2위로 내려갔지만 고작 1점 차다.

세계 여자 골프의 간판으로 우뚝 선 이민지에게 특별한 포즈를 부탁했다. 양손으로 ‘V’를 그리는 것. 메이저 2승과 올림픽 2회 출전 경력의 의미다. 한 손은 익숙한 V, 다른 한 손으로는 요즘 유행이라는 ‘거꾸로 V’를 만들게 했다. 어색하다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민지는 이것 역시 끝내 해냈다.

2인 1조 경험서 얻은 좋은 기운으로 에비앙 제패

1년도 안 지나 메이저 우승을 한 번 더 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이민지는 “감과 흐름이 좋았고 그 흐름 따라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경기를 하면서 ‘아, 우승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예상이 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저 어떻게 되든 간에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는 주의이고 그게 또 목표이기도 해서 그렇게 하다 보니 좋은 흐름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우승이 나온 것 같아요.”

LPGA 투어 내 유일한 2인 1조 대회를 통해 기운을 끌어올렸다는 얘기도 했다. 이민지는 “작년 에비앙 몇 주 전에 샷에 비해 스코어가 잘 안 나와서 흐름이 좀 아쉬운 시기가 있었는데 다우 그레이트레이크스베이인비테이셔널을 되게 재밌게 치면서 좋은 기운을 받았고 결국 바로 다음 대회인 에비앙에서 우승하게 됐다”고 돌아봤다.

이민지는 2021년 US 여자오픈 우승자 사소 유카(일본)와 호흡을 맞춰 5위를 했다. 종종 같은 조로 경기한 적 있고 둘 다 미국 댈러스에 집이 있어서 가끔 연습도 같이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3개 대회 연속으로 40~50위권에 머물던 흐름을 팀 대회를 통해 끊어낸 이민지는 에비앙에서 7타 차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남동생 이민우의 유러피언 투어(현 DP 월드 투어) 스코티시 오픈 우승 뒤 2주 만에 누나가 바통을 이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동생과 나

이민지는 올 4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동생 이민우가 마스터스에 출전하게 되면서 유명한 사전 행사인 파3 콘테스트에 나간 것이다. 가족을 캐디로 동반하는 게 보통인 이 행사에서 이민우는 누나에게 골프백을 맡겼다. 흰색 점프 수트 차림으로 초록 모자를 쓴 이민지는 처음 밟는 오거스타 내셔널GC의 분위기를 흠뻑 즐겼다. “워낙 특별하고 역사가 많은 골프장이고 또 그런 대회라서 정말 좋았다”는 이민지는 “본 경기 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동생 응원을 제대로 못 한 게 좀 아쉽다. 그래도 코스는 다 둘러보고 클럽하우스도 들어가 봤다”고 했다. “민우의 첫 마스터스를 가족이 다같이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특별하고 재밌었어요.” 어릴 때부터 영감을 주는 존재인 누나가 함께한 덕분일까. 이민우는 메이저 첫 컷 통과와 함께 공동 14위의 좋은 성적을 냈다.

유러피언 투어 2승의 이민우는 소문난 장타자다. 정교함으로 승부를 보는 이민지와 반대다. 인스타그램을 즐기지 않는 이민지와 달리 이민우는 소셜미디어 활동도 꽤 활발하다. 이민지는 “저랑 다르게 민우는 외향적인 스타일”이라고 소개했다. 스윙 코치 리치 스미스가 남매를 지도한다. 스미스 코치와 14년째 함께하고 있다는 이민지는 “어릴 때부터 봐와서 친구이자 코치이자 멘토다. 내 경기 패턴을 되게 잘 알아서 딱 보면 바로 고쳐준다. 인생의 컨설턴트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코치와 트레이너, 물리치료사가 ‘팀 이민지’를 이룬다.

이민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누나는 5언더파 치고 있는지, 5오버파 치고 있는지 모습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코스 안에서 감정 조절하는 노하우를 묻자 이민지는 “그런 건 노하우가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감정을 보여주는 선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는데 그건 성격의 차이인 것 같다”며 “감정을 보여주면 좀 더 ‘업’되는 선수들도 있지만 저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편이다. 주니어 시절부터 그랬다”고 했다. “2등을 하거나 더 못할 때가 있어도 다 거기서 배우는 게 있고 실패도 교훈 삼을 수 있는 거고…. 늘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어요. 어차피 골프는 우승보다 질 때가 더 많은 거 아닌가요?”

“제 기록 빨리 깨져도 괜찮아요”

올해 US 여자오픈에서 이민지는 77년 대회 역사를 바꿔 놓았다. 우승 스코어는 최종 합계 13언더파 271타. US 여자오픈 72홀 최소타다. 1996년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1999년 줄리 잉크스터(미국), 2015년 전인지가 세운 272타를 1타 앞섰다.

자신이 세운 최소타 기록이 얼마나 오랫동안 깨지지 않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이민지는 “솔직히 언제 깨져도 상관없다”고 했다. “기록이 깨진다는 건 우리 투어에 그만큼 더 잘하는 선수들이 나왔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투어 수준이 더 높아지면 저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그렇고 더 좋은 플레이를 보이려고 더 많이 노력할 것 같아요.”

US 여자오픈 우승 상금은 무려 180만 달러였다. 당시 환율로 약 22억 원. 상금이 들어온 계좌를 확인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민지는 이번에도 차분했다. “막 흥분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물론 좋긴 엄청 좋았죠. 하지만 ‘이 돈으로 뭘 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냥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족들 사주고 그런 생각만 했어요. 상금 관리요? 그 분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해주고 있어요.”




US 여자오픈은 이민지의 ‘최애’ 대회였다. “타이거 우즈 선수가 우승하는 것(남자 US 오픈)도 많이 보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특별한 대회다’ ‘내 꿈이다’ ‘정말로 우승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왔죠.” 그럼 올해의 선수상과 상금왕 등 시즌 타이틀은 어떤 의미일까. 이민지는 “그거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타이틀을 따기 위해선 남은 대회들에 좀 더 노력이 필요할 테고 좋은 경기를 해서 좋은 성적을 내면 타이틀은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라고 했다. 내년 시즌 목표는 ‘두 번째로 애정하는 대회’인 AIG 여자오픈(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이라고. 이민지는 “인터내셔널 크라운처럼 팀 이벤트도 있고 대회가 더 많아질 거라고 들어서 올해보다도 재밌는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 전에 올해 크리스마스를 한국에서 보낼 계획도 짜고 있다. 리디아 고의 결혼식에 맞춰 들어와 알찬 휴식을 보낼 예정이다. 가장 기대하는 것은 역시 음식. 한국에 올 때마다 음식 배달 플랫폼을 이용해 프라이드 치킨, 떡볶이, 각종 디저트 등 야식을 즐기는 이민지는 한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다. 그래도 ‘소울 푸드’는 바뀌지 않는다.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랑 보쌈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프로 골퍼 지망생이었던 어머니 이성민 씨는 데뷔부터 다섯 시즌 동안 딸과 함께 다니며 맛깔 나는 한식으로 투어 생활을 든든하게 뒷바라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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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관심이 가장 큰 힘

LPGA 투어 41승의 전설 카리 웹(호주)은 이민지에게 롤 모델이자 멘토이자 가까운 친구다. 이민지는 “이모 같다”고도 했다. “볼 때마다 밥 같이 먹고 고민 있으면 털어놓고 못 볼 땐 문자 자주 주고받고 그래요.” 카리웹재단의 장학생 출신이기도 한 이민지는 메이저 대회 때 웹과 숙소를 같이 쓴 사이기도 하다.

이민지도 프로 골퍼의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웹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처음 골프를 시작할 때부터 ‘발전’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발전함으로써 제가 속한 투어가 발전하고 또 어린이들의 발전을 도울 수 있는 그런 모델을 지금도 바라고 있어요.” 세계 랭킹 3위의 이민지는 세계 1위 등극보다도 “아이들이 우리 투어와 골프에 더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것”을 더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경기 잘 봤다’ ‘TV로 다 지켜봤다’ 같은 얘기를 상당히 많이 해주는데 그런 말들을 들을 때 정말 기분 좋다”고 했다.

이민지는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감, 자기가 속한 투어에 대한 자부심으로 골프를 한다. US 여자오픈 우승 인터뷰에서도 “많은 소년, 소녀들이 스포츠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제가 좋은 롤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큰 상금에 대해서는 “상금을 생각하고 친 것은 아니지만 (상금 증액은) 투어나 여자 골프를 위해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했다.



여자 골프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의 LIV 골프가 들어올 수 있다는 전망과 관련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정말 와야 오는 것이고 LPGA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잘 지켜봐야 한다”며 “개인적인 최종 목표는 메이저 대회에서 포인트를 쌓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거라서 LIV 선수가 메이저에 못 나가는 분위기면 어렵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민지는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늘 피칭 웨지, 8번 아이언, 6번 아이언, 4번 아이언 등 짝수 번호 채로만 연습한다. 징크스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하다 보니 습관이 됐다. 그만의 루틴이다. 코스를 많이 돌기보다 레인지에 오래 머무는 스타일이다. 골프 외의 루틴은 독서. 주로 전자책으로 보고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특히 좋아한다.

이민지만의 골프 철학, 원칙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내가 갖고 있는 100%, 101%를 쏟아내는 거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이르면 뭐 다른 건 없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나 자신이 아는 거니까. 100%나 그보다 더한 노력으로 플레이 했으면 잘 되든 안 되든 결과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는 그래요.”

PROFILE

출생: 1996년 호주 퍼스 | LPGA 데뷔: 2015년

주요 경력:

2012년 US 걸스 주니어 우승, 2014년 아마추어 랭킹 1위

2015년 킹스밀 챔피언십서 LPGA 첫 우승

2016년 리우 올림픽, 2021년 도쿄 올림픽 참가

2021년 에비앙 챔피언십, 2022년 US 여자오픈 우승(LPGA 통산 8승)


양준호 기자 사진=박준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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