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가 수준이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하고 있다는 점이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로 드러나면서 코스피가 1년 9개월 만에 3% 넘게 상승했다. 그간 긴축 공포에 짓눌려온 정보기술(IT)·게임 등 성장주가 두 자릿수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코스피의 거래 대금은 10조 원을 넘어서면서 미국의 온기가 국내 증시에 온전히 번졌다. 그동안 공매도가 집중됐던 종목들에 대한 ‘쇼트커버링’이 일어나면서 단기 랠리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80.93포인트(3.37%) 오른 2483.16에 거래를 마쳤다. 코스피가 3% 넘는 상승세를 보인 것은 올해 처음이며 지난해 2월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코스닥도 전날보다 23.44포인트(3.31%) 오른 371.22에 장을 마감하면서 온기를 함께 누렸다.
고금리 기조에 주가가 수직 추락했던 성장주와 반도체 등 대형주 중심으로 외국인과 기관의 수급이 들어오면서 지수가 상승했다. 특히 그동안 공매도가 몰리며 낙폭이 컸던 성장주들의 급등세가 이어졌다. 이날 ‘카카오(035720) 4형제’는 상장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인 카카오(15.55%)부터 카카오뱅크(323410)(20.26%), 카카오페이(377300)(29.92%), 카카오게임즈(293490)(11.08%)까지 모든 종목이 두 자릿수의 상승률을 보였다. 이 밖에 네이버(9.94%), 크래프톤(259960)(18.23%), 엔씨소프트(036570)(13.41%) 등 성장주 대표주자들과 삼성전자(005930)(4.14%), LG에너지솔루션(373220)(3.14%), SK하이닉스(000660)(4.94%) 등 몸집이 큰 종목들도 급등했다.
이날 증시에는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개선된 외국인과 기관의 수급세가 물밀 듯이 들어오는 한편 증시 급등에 차익 실현 매물을 쏟아낸 개인은 2조 원 넘는 순매도세를 보였다. 외국인과 기관은 이날 코스피에서만 각각 6951억 원, 9916억 원을 사들였다. 코스닥시장까지 합산할 경우 외국인은 9000억 원, 기관은 1조 3000억 원까지 순매수 규모가 늘어난다. 반면 개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 6600억 원, 코스닥에서 5300억 원을 순매도하면서 총 2조 원 넘는 물량을 쏟아냈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의 거래 대금은 13조 7000억 원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올해 5월 말 이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의 10월 CPI에서 물가 둔화 조짐이 나타나면서 시장은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10월 CPI는 지난해 동기 대비 7.7% 오르는 데 그쳤다. 올해 1월 이후 최저 수준이며 시장 전망치인 7.9%를 밑돌았다. 이에 시장은 바로 반응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위원인 패트릭 하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그간 우리의 누적된 긴축을 고려했을 때 향후 몇 달 동안 우리는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것으로 예상한다”고 언급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페드워치에 따르면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 인상 폭이 50bp(1bp=0.01%포인트)로 결정될 확률은 전날 56.8%에서 80.6%로 크게 올랐다.
외환시장도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59원 10전 내린 1318원 40전에 거래를 마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율은 1400원을 웃돌았다. 하지만 긴축 속도 조절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1300원대 초반까지 하락하면서 코스피 같은 위험자산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 수요를 증폭시켰다.
증권가는 기존 고물가·고금리 악재가 희미해진 상황에서 연말까지 증시의 단기적인 랠리가 가능하다고 본다. 국내외 증시와 외환시장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으면서 외국인의 수급이 지속적으로 유입돼 증시를 견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편득현 NH투자증권 WM마스터즈 전문위원은 “미국 CPI 호재가 아니더라도 외국인 수급에 힘입어 당분간 랠리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CPI마저 긍정적으로 발표되면서 현재 시장에서는 악재가 사라졌다”며 “기술적 반등 추세는 연말까지 이어지는 것이 기정사실화됐다”고 말했다.
다만 증시에 추가 충격이 가해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기업의 펀더멘털 문제에 대한 시각이 이분화되면서다. 일각에서는 아직 기업 실적 악화와 역성장 충격이 증시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경기 침체에 더해 미국의 통화정책이 다시 한 번 불확실성으로 다가올 경우 증시가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미 기업들의 기초 체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증시에 충분히 반영돼 있으며 주가순자산비율(PBR) 측면에서 코스피의 자본이 꾸준히 쌓여간다면 지수가 우상향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