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반도체 올림픽’에서 1위 韓 처음으로 꺾은 中…“칩 설계 관심·협업 절실”

최재혁 KAIST 교수가 16일 경기 성남 판교이노밸리에서 열린 ‘ISSCC 2023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학회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제공=사피온코리아최재혁 KAIST 교수가 16일 경기 성남 판교이노밸리에서 열린 ‘ISSCC 2023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학회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제공=사피온코리아




'반도체 설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중국 논문 채택 수가 한국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 기조 아래 공격적인 연구개발(R&D)투자를 진행한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리나라가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중국이 반도체 주도권을 가져가는 건 시간 문제라는 지적이다.



지난 16일 ISSCC 한국위원회는 경기 성남 판교이노밸리에서 'ISSCC 2023 프레스 콘퍼런스'를 열고 내년도 학술 대회에 선정된 논문과 산업계 연구 동향을 소개했다. 올해에는 아날로그, 데이터 컨버터, 디지털 분야, 무선, 고주파(RF), 메모리 등 분야에서 629건의 논문이 제출됐다. 이 중 최종 심사를 거쳐 선정된 논문은 총 198건이다.

이번 학회에서 한국은 32건 논문이 채택됐다. 중국(59건)과 미국(42건)에 이은 3위다. 중국 논문 채택 수가 한국보다 많은 것은 ISSCC 개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시아 지역만 놓고 보면 지난 8년 간 한국이 1위 자리를 내준 적은 단 2016년 단 한 번이다. 이 당시에는 대만이 근소한 차로 한국을 겨우 제치고 선두에 올랐지만 지금은 중국이 2배 가까운 격차로 2위 한국을 따돌린 것이 주목된다.

ISSCC 2023 아시아 주요 국가 논문 채택수 비교표. 가장 오른쪽이 올해 논문 채택수를 나타내는데 중화권(중국, 홍콩, 마카오 포함)이 한국, 대만, 일본을 크게 앞섰다. 한국은 2016년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자료=ISSCCISSCC 2023 아시아 주요 국가 논문 채택수 비교표. 가장 오른쪽이 올해 논문 채택수를 나타내는데 중화권(중국, 홍콩, 마카오 포함)이 한국, 대만, 일본을 크게 앞섰다. 한국은 2016년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자료=ISSCC



연구 기관 별 논문 채택수를 봐도 한국은 부진했다. 물론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의 논문이 8건 채택돼 체면 치레를 했지만 올해 초 열렸던 ISSCC 2022 행사에서 16건이 선정된 것을 고려하면 절반이나 줄었다. 지난 행사에서 1위를 차지했었던 카이스트도 마카오대, 중국 칭화대 등 중화권 대학들에 밀려 3위에 그쳤다. 분야 별로 보면 삼성전자가 육성 중인 이미지 센서, 굴지의 영향력을 지인 메모리 분야에서는 강세를 보였지만 7편의 중국 논문이 채택된 디지털 컨버터 분야에서는 단 한편의 국내 논문도 선정되지 못해 편차가 큰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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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CC는 세계 3000여명 반도체 연구자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는 학회로 ‘반도체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1954년 설립 이후 올해 70회 학회 행사를 열 만큼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구글, 테슬라, 엔비디아 등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참석해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을 공유한다는 것도 포인트다. 제출된 연구 논문 심사 역시 까다롭게 진행된다.

이런 학회에서 중국이 약진하고 한국의 기세가 꺾인 상황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입지가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날 ISSCC 2023 소개를 맡은 최재혁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자금 투자로 모든 분야에 걸쳐 중국 논문 채택수가 늘었다"며 "한국과 비교해 학생 수가 20배, 교수 수 역시 20배로 많은 것이 현실"이라고 분석했다. 제민규 KAIST 교수는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한국의 논문 제출 수는 일시적이지만 예년보다 훨씬 적어졌다”며 “전력 반도체 분야에서는 자동차 시장에서 주목 받는 갈륨나이트라이드(GaN), 전력 전달 장치 등 연구가 글로벌 추세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파운드리(칩 위탁생산) 대기업과 팹리스(설계 업체) 간 협력 사례가 적고 세계 점유율 1%에 불과한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미미한 존재감과 기술력도 문제로 지적됐다.

16일 경기 성남 판교이노밸리에서 열린 ‘ISSCC 2023 프레스 콘퍼런스’ 모습. 사진제공=사피온16일 경기 성남 판교이노밸리에서 열린 ‘ISSCC 2023 프레스 콘퍼런스’ 모습. 사진제공=사피온


행사에 참석한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 대한 국가·업계의 꾸준한 관심과 협력, 인재 양성 방안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김지훈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국내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신경처리장치(NPU), 데이터처리장치(DPU) 분야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다"며 "학교에서 많은 교수를 채용해서 시장에 양질의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선순환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 회사인 류수정 사피온 대표는 "머신러닝과 AI 분야는 각종 반도체 기술이 접목되는 분야"라며 "기술 주도권을 잃지 않도록 더욱 긴밀한 산학연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강해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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