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여야는 협치 대신 각자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몰두하며 ‘정기국회 내 예산 처리’라는 약속을 스스로 파기했다. 예산과 부수 법안에 대한 주요 쟁점은 대체로 해소했지만 ‘법인세 인하’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문제를 두고 여야가 극한 대치를 이루며 9일 본회의는 파행을 겪었다. 21대 국회는 2014년 국회 선진화법 시행 이후 가장 늦은 지각 합의라는 오명은 물론 국가 살림살이조차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날 예정됐던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9일까지 639조 원 규모의 예산안 및 예산 부수 법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야 합의안이 도출되지 못한 탓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여야정 회의, 김 의장 주재 회동 등에서 만나 예산안 처리를 논의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극적 타결’ 가능성이 피어올랐으나 회의장에서는 고성만 오가며 기대감은 조각났다.
여야가 치열하게 충돌했던 윤석열표 예산과 이재명표 예산의 주요 쟁점은 대체로 해소됐고 금융투자소득세도 2년 유예로 가닥이 잡혔다.
협상 막판 최대 난제는 ‘법인세 개편’이었다. 민주당이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25%→22%) 계획에 반기를 들자 김 의장은 인하 폭은 유지하되 시행을 2년 늦추자는 중재안을 내놨다. 하지만 민주당은 “대기업용 부자 감세”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이외 기초연금 부부합산제 폐지, 지역화폐 예산 등도 과제로 남았다.
예산안과 패키지로 묶인 이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도 자동으로 밀렸다. 민주당은 이 장관 해임안과 수정 예산안을 단독 처리하겠다며 국회의장실을 찾아 본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 의장은 거절했다. 9부 능선을 넘은 예산안 합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물론 향후 국정조사 정국까지 격랑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실 방문 뒤 기자회견을 열고 “김 의장께서는 합의안을 마련해 오지 않으면 민주당안만으로는 (본회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며 해임건의안 우선 처리도 김 의장이 거부했다고 밝혔다.
여야 지도부는 11일 본회의 개최를 목표로 물밑 협상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해임건의안은 보고 뒤 72시간 내 처리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되기 때문에 민주당은 11일 오후 2시까지 반드시 본회의를 열어야 한다. 국민의힘은 이 점을 파고들며 민주당에 ‘선 예산안, 후 해임안 처리’를 요구하며 윤석열 정부의 첫 예산안 통과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본회의 개의와 안건 상정 권한을 가진 김 의장에게도 11일 본회의를 열어 동시에 처리하는 것이 부담이 덜하다는 평가다. 주 원내대표는 “김 의장께서는 국회발 위기는 있을 수 없고 해임건의안도 시한이 되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며 11일 본회의 개최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한 여당 지도부 인사는 “11일 두 안건이 상정될 수 있지만 반드시 예산안을 먼저 의결해야 한다”이라며 “해임안 표결에는 불참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1대 국회는 2014년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후 정기국회 회기 내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첫 사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민주당은 국정 발목 잡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 부채를 1000조 원까지 늘리며 국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지만 야당이 되자 24조 원이 구조조정된 정부 예산안에 칼날을 들이밀며 느닷없이 ‘재정 건전화’를 주문했다.
여당은 주먹구구식 협상을 벌였다는 지적에 직면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안 사수가 쉽지 않다는 것이 자명했음에도 정기국회 100일 동안 협상 전략 하나를 세우지 못했다. 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당정은 방향성 없이 설득만으로 거대 야당을 돌려세울 수 있다고 낙관했다”며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법인세 인하를 호언했지만 정작 까보니 돌파할 패 하나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