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 불황을 이겼다. 글로벌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가 창사 이래 연간 최대 매출인 84억 달러를 기록했다. 크리스티는 1766년 설립된 256년 전통의 경매사로 소더비(Sotheby’s)와 함께 세계 미술경매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크리스티는 20일 “미술시장 역사상 가장 높은 연간 판매 총액인 84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했다. 우리 돈으로는 약 11조원이다. 크리스티는 지난해 71억 달러(약 8조4000억원) 규모의 미술품을 판매해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를 단숨에 극복했고, 연이어 올해는 약 17%의 매출 신장을 보여줬다.
성공 요인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폴 G.앨런의 소장품을 한 번에 내놓은 지난 11월 경매의 흥행 덕분이다. 르네상스 거장 산드로 보티첼리부터 인상주의의 에두아르 마네·빈센트 반고흐·조르주 쇠라, 근현대미술의 재스퍼 존스와 생존작가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500년 서양미술사를 관통하는 박물관급 컬렉션 156점이 경매에 올랐다. 글로벌 경제 지표가 불황 기조로 돌아섰음에도 명작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고, 낙찰 총액은 기대치를 크게 뛰어넘어 16억 2000만달러(약 2조1000억원)를 기록했다. 개인 컬렉션 경매 중 역대 최대치였다. 크리스티 측 관계자는 “5점의 작품이 1억 달러 이상에 판매됐다”면서 “뉴욕 프리뷰 때는 관람 대기줄이 길게 늘어섰고, 온라인 전시 방문자는 400만명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쇠라의 ‘모델들, 군상 (작은 버전)’이 1억4920만 달러(약 2000억원),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1억3780만 달러(약 1836억 원),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이 1억1720만 달러(약 1560억 원), 폴 고갱 ‘모성 II’가 1억570만 달러(약 1408억 원), 클림트 ‘자작나무 숲’이 1억460만 달러(약 1393억 원)에 새 주인을 찾아갔다.
매출 증가의 일등공신은 미술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젊은 컬렉터인 ‘밀레니얼’(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한 세대)로 확인됐다. 크리스티 측은 “올해 전체 구매자의 35%가 신규 고객이며, 이들의 34%가 밀레니얼 세대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서 “밀레니얼은 글로벌 전체 구매자의 21%이고, 밀레니얼의 글로벌 경매 구매액의 62%를 아시아 태평양이 차지할 정도로 아시아의 신규 컬렉터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밝혔다. ‘프리즈 서울’의 개최와 굵직한 해외갤러리의 상륙 등 글로벌 미술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40대 이하 ‘M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신규 고객은 65%가 온라인 경매를 통해 유입됐고, 경매마다 평균 1200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전후 및 동시대미술, 핸드백·시계 등의 명품, 와인 경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요자 비중은 아메리카(40%), 유럽·중동·아프리카(34%), 아시아태평양(26%) 순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컬렉터가 뉴욕 경매에서 작품을 구매하는 비중은 60%나 증가했는데, 이는 뉴욕 경매에서나 볼 수 있는 500만 달러 이상의 걸작을 지칭하는 ‘마스터피스’에 대한 열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킹달러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폴 앨런 경매 낙찰작의 29%을 아시아인이 구매했고, 총액의 25%에 달하는 5000억원이 아시아에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