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율이 야당안(세액공제율 10%)보다도 못한 8%로 정해지자 반도체 업계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세수 감소를 우려한 기획재정부의 입장이 수용됐다고 하지만 ‘K칩스법(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법)’의 핵심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누더기가 되면서 법안 발의 후 4개월간 허송세월한 셈이 됐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정부가 반도체 업계를 도와주기는커녕 등 뒤에 칼을 꽂았다는 비판마저 나왔다.
23일 여야는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를 현행 6%에서 8%로 늘리는 내용 등을 포함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합의했다. 현행 세액공제 비율은 대기업 6%,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다. 중견·중소기업은 기존 세액공제 비율을 유지하되 대기업만 2%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사실 이번 개정안은 K칩스법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애초 여당은 2030년까지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투자 금액 대비 세액공제를 대기업 20%, 중견기업은 25%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야당은 재벌 특혜라는 이유로 대기업 10%, 중견기업은 15%를 제시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여야안 모두에 난색을 표했다. 그간 25%, 30% 규모의 세액공제율이 없었던 만큼 세수 감소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법안 발의 후 4개월이 넘도록 여야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자 여야 지도부는 결국 기재부 입장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논의 자체가 되지 않으면서 결국 정부안만 남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반도체 업계는 세액공제 확대 폭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며 정치권을 성토하는 분위기다.
반도체가 글로벌 공급망의 무기로 부각되고 반도체 투자 유치를 위한 각국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오히려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8%의 세액공제는 반도체 경기가 하강하는 시점에서 투자 유인책이 되기 어려우며 기업들이 국내 대신 미국에 투자할 수도 있다”며 “지금보다 2~3배의 법인세 공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 세액공제율 8%는 주요 경쟁국과 비교해 크게 낮다. 미국의 경우 8월 반도체과학법(CHIPS Act) 공포를 통해 반도체 설비투자를 하는 기업에 세액을 25% 감면해주고 있다. TSMC를 보유한 대만 역시 현지 반도체 회사들의 연구개발(R&D)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15%에서 25%로 높이는 산업혁신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뿐만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대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 반도체가 국가 전략자산이 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하는 ‘대기업에 지원을 한다’는 부자 프레임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다. 일본 정부는 TSMC가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에 기업 총 투자비의 40% 수준인 4조 5000억 원, 독일은 인텔의 마그데부르크 지역 신규 투자에 총 투자비의 40% 수준인 8조 9000억 원을 각각 지원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유럽연합(EU)의 경우도 지난달 430억 유로(약 58조 원)를 투입하는 유럽반도체법(ECA)에 합의했다. 중국은 지난해 65나노(㎚·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제조 기업이 원자재나 장비를 수입할 때 관세를 아예 면제해주고 있다.
여당의 K칩스법 발의를 주도한 양향자 무소속 의원은 “법안을 본회의에서 부결시켜 달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양 의원은 “기재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중 가장 중요한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애초 25%에서 8%로 후퇴시켰다”며 “하루하루 가쁜 숨을 쉬는 기업들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 일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