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중단했던 원전 건설을 11년 만에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와 탈(脫)탄소 대응을 위해 사고 이후 금기로 여겨졌던 원전을 다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은 이와 함께 탈탄소 분야에 향후 10년 동안 1500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는 전날 이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그린트랜스포메이션(GX)’ 기본 방침을 확정했다. GX 기본 방침은 일본 정부가 향후 10년 동안 탈탄소 사회 실현을 위해 마련한 중장기 전략이다.
일본 정부는 원전을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탈탄소 양립을 위한 주요 전원이라고 규정한 뒤 “앞으로 지속적으로 활용한다”고 명시했다. 이를 위해 차세대 혁신 원자로의 개발·건설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우선 폐쇄가 결정된 원자로 재건축에 착수한다. 원전 수명의 경우 원칙적으로 40년, 최장 60년까지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정한 그대로 유지했지만 운전을 일시적으로 멈춘 정지 기간은 운전 기간에서 제외하기로 규정을 바꿨다. 이렇게 되면 그만큼 원전 수명은 더 늘어나는 효과가 난다.
특히 일본 정부는 재건축 이외 원전 개발·건설에 대해서도 “향후 상황을 근거로 검토해 나간다”고 밝혀 대형 원전의 신규 건설 가능성 역시 열어뒀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원전 신설이나 증설·재건축은 없다’고 했던 것에서 180도로 돌아선 것이다.
일본은 원전 정책 ‘U턴’의 근거로 우크라이나발 에너지 위기를 들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전력 생산 비용이 치솟은 만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고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마련한 만큼 일본도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올 3월과 6월 ‘전력수급 핍박(부족)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전력 수급에 대한 위기감이 커진 상태다. 기저 발전원인 석탄 발전소의 경우 30%가량이 지어진 지 40년이 넘는 노후화 설비여서 올 들어 발생한 석탄 발전소 가동 중단이 총 180차례가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출력이 안정적인 원전의 활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는 탄소 감축이다. 일본은 지난해 기준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0억 톤 이상인 세계 6위 탄소 배출국이다. 일본 역시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선언한 만큼 화석연료를 탄소 배출이 적은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그러나 전력 확보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러시아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늘리고 있는 실정인 만큼 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목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원전 1기를 가동할 경우 LNG 약 100만 톤의 사용을 줄일 수 있고 17기를 가동한다면 약 1조 6000억 엔(약 15조 7400억 원)을 절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번 GX 기본 방침에 민간과 정부가 탈탄소를 위해 향후 10년 동안 총 150조 엔(약 150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재생에너지 규모 확대와 수소·암모니아 공급망 구축, 축전지 산업, 차세대 자동차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가 중점 투자 분야다. 일본 정부는 또 탄소세와 탄소 배출권 거래 등 ‘카본 프라이싱(Carbon pricing)’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해 탈탄소를 위한 재원으로 쓴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 변화에 일본 내에서 반대 여론이 만만찮은 만큼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아사히신문은 “정부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원전 정책 재검토를 지시한 8월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지난 11년간의 기조를 뒤집었다”며 “원전 ‘회귀’는 안전성을 고려하지 않은 졸속”이라고 비판했다. 닛케이도 “정부에 원전 재가동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지금은 원래 가동 중인 원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전력 수급이 비상인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조양준 기자 mryesandn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