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목요일 아침에] 이번 계묘년을 대하는 자세

문성진 논설위원

1903년 러·일 잇단 국권 침해에도

고종, 호화 잔치 벌이고 미신 신봉

2023년 정치는 ‘4류’도 못돼 걱정

계묘년 본뜻대로 밝은 미래 열리길





2023년 계묘년이 밝아오고 있다. 명리학의 관점에서 물을 의미하는 계(癸)는 먹거리를 상징하고 묘(卯)는 지혜의 동물인 토끼를 말한다. 그래서 이번 계묘년은 재난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지혜와 창의적으로 먹거리를 마련하는 능력이 충만할 것이라는 덕담이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1903년의 계묘년은 암울했다. 우선 그해 4월의 ‘양무호 사기 사건’은 일제의 탐욕에 어이없이 당했던 참극이었다. 일본 미쓰이물산은 영국으로부터 25만 원에 산 양무호를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쓰다가 성능이 떨어지고 고장이 잦아지자 대한제국을 속여 두 배 값인 50만 원에 팔아치웠다. 대한제국은 이 배를 군함으로 개조한다면서 25만 원을 추가 지출함으로써 당시 1년 정부 예산의 두 배가량을 탕진했다. 그해 5월에는 제정러시아가 ‘용암포 개항 사건’을 일으켰다. 100명의 군대를 보내 압록강변의 벌목 목재 집산지인 용암포를 점령하고 이름까지 ‘포트 니콜라이’로 바꿔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고종은 7월 25일 덕수궁 뜰에 3000명의 관료들을 모아놓고 즉위 40주년, 50회 탄신일 기념 잔치를 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고기는 산처럼 쌓아놓고 술은 샘처럼 많아 잔치를 즐기니 보통 때의 수라상에 비하면 10배가 넘는 가짓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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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계묘년은 다를 것이다. 10대 경제 대국, 6대 군사 대국인 대한민국이 120년 전과 같을 수 없다. 다만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그때와 닮은꼴로 자멸의 길을 걷고 일본이 군사적 대외 확장의 야심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3년 주목해야 할 10가지 글로벌 트렌드 중 우크라이나 전쟁을 첫 번째로 꼽으면서 “에너지 가격, 인플레이션, 금리, 경제 성장, 식량 부족 문제는 모두 이 전쟁이 앞으로 몇 달간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달렸다”고 했다. 적절한 대응책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회생 불능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은 최근 ‘국가안보전략’ 등 3대 안보 문서에 자위대의 반격 능력 부여와 방위비를 5년 안에 현재의 2배로 증액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국권을 침탈했던 일본이 평화 헌법의 ‘전수방위(공격당할 때 방어용으로만 무력 행사)’ 원칙을 접고 군사 대국화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헌법상 우리 영토인 북한에 대한 일본의 선제공격 가능성에 대한 빈틈 없는 대책이 필요하다.

국가의 위기는 ‘블랙스완’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닥쳐오기도 하지만 ‘회색코뿔소’처럼 뻔히 보이는 위험을 간과하다가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120년 전 계묘년이 그랬다.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는 “대한제국을 5년 만에 다시 와보니… 고종 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고 개탄하는 글을 1903년에 남겼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일본 등의 속셈을 몰랐고 관직은 공적 능력이 아니라 뇌물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때 이런 폐단들을 고쳤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는가. 저질적인 정치를 보면 낙관할 수 없다. 여야는 경제 복합 위기와 북한의 도발 등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주변 강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나라의 활로를 열어야 하는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가 힘을 한데 모아 정치 역량을 극대화해야 마땅한데 여야는 ‘나 살고 너 죽자’ 식의 패싸움에 여념이 없다. 1995년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 경쟁력은 2류”라고 했는데 지금 정치는 4류도 너무 후한 점수다. 국가 요직을 검사·모피아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이들의 좁은 시야로는 다양한 위험 요소를 제대로 간파하기 어려워 나라가 눈 뜬 채 회색코뿔소에 들이받히는 재난에 빠질 수도 있다. 부디 새해에는 협량의 정치 대신 통 큰 정치가 펼쳐져 계묘년에 담긴 뜻대로 국난을 잘 이겨내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길 기대해본다.


문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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