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노동 개혁’을 전면에 내세웠다. 실업급여를 인상하는 대신 해고를 쉽게 하고 3~5년간 대기업·공공 부문 임금을 동결해 하청·비정규직 임금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교섭단체 연설로는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21대 총선에서 반노동 총선 후보 명단에 홍 의원을 포함시켰다.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노동운동가 출신인 홍 의원과 민주노총은 껄끄러운 관계를 한동안 이어갔다.
국민의힘이라고 다를까. 대선이 절정에 달하던 2021년 12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한국노총 비공개 회담 뒤에 노동이사제와 근로시간면제한도제(타임오프제)를 전격 수용했다. 윤 후보는 “표가 노동자들에게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그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노동자도 다양하기 때문에 정부는 전체 노동자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한국노총 대변인 브리핑) 박빙의 대선 정국에서 140만 표의 힘을 무시할 수 없던 셈이다.
선거에서 한 표가 아쉬운 각 정당이 노조의 압박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선거 뒤 노조는 청구서를 내밀었고 노동 개혁은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정치권이 30년간 노동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별 성과가 없었던 이유다.
◇16개월 선거 휴지기…노동 개혁 절호의 기회=2016년 총선을 시작으로 선거는 매년 있었다. 양대 노총은 선거 등 굵직한 정치 이벤트를 활용, 입김을 강화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노조의 촛불 청구서를 들고 시작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에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요란한 구호는 같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촛불’로 집권한 정부가 느끼는 압박감은 더 컸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지원하는 의원조차 없었다. 한국노총의 지지를 받고 정책 협약까지 맺었던 민주당이었지만 당시 현실은 그랬다. ‘잘해야 본전’일 뿐 양대 노총에 빌미나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는 뜻이다. 조직표는 그만큼 정당과 정권에게 부담 요인이었다. 다만 앞으로 16개월 동안 전국 규모의 선거가 없다. 노조 청구서를 피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만들어진 셈이다.
◇정부 주도 노동 개혁…넘어야 할 巨野=선거 없는 골든타임을 윤 대통령은 노동 개혁에 쏟아붓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김영삼 정부 이후 한국 노동 개혁은 사회적 대화를 우선해왔지만 윤석열 정부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통해 행정부 주도의 개혁을 선언했다.
문제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개혁안을 기초로 정부가 법안을 만들어 국회로 보냈을 때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현재까지 정부가 발의한 법안은 단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다. 이처럼 여야 관계가 사상 최악의 상황에서 현 정부 노동 개혁안이 국회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3월 초 여당 대표가 새로 선출되고 여야 관계 복원을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해도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5월 대통령 취임 이후 윤 대통령은 야당의 대표뿐만 아니라 원내대표와도 회동 한 번 한 적이 없다.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노동 개혁에 야당의 협조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여소야대 현실을 직시하고 야당의 협조를 이끌기 위해 대국민 여론전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초빙교수는 “정치권은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며 “표에 구애받지 않는 초당적 사회적 대타협 기구를 통해 노동 개혁의 중심 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야당의 지지를 끌어들이되 여의치 않으면 세워둔 원칙을 밀어붙이는 뚝심도 필요하다는 조언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 개혁은 결국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MZ…노조 이어 정당에도 균열=여야 간 정쟁을 벗어난 ‘초당적 사회적 대타협 기구’의 구성을 위한 MZ 노조의 역할도 주목되고 있다. MZ 세대가 노조에 균열을 일으키며 투쟁 일변도의 쟁의 방식을 대화와 소통의 방식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다. 이 같은 노조의 균열이 정당 내부의 균열로 연결된다는 점은 초당적 기구의 설립을 재촉할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올해 8월 민주노총이 현장 노조 대의원 이상 3979명을 대상으로 ‘확대 간부 정치 의식 조사’ 응답 결과는 정당의 노동정책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시 조사에서 민주노총 20~40대 간부들의 대선 투표 정당은 민주당·진보정당·국민의힘 순으로 그간의 투표 행태와 다를 게 없었지만 연령대별로 보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다. 20대의 국민의힘 지지율은 18.2%, 30대는 16.1%였던 반면 40대는 5.2%, 50대 이상은 4.9%였다. 2030세대 민주노총 간부 5명 중 1명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에 투표했다는 얘기다.
이는 MZ가 일으킨 노조의 균열이 정당의 균열로 확대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MZ 세대는 무조건적인 민주당·진보정당 지지라는 기존 관성을 깨고 있다는 것으로 정당 역시 MZ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실리적인 노동 개혁안을 찾아야 한다는 진단이다. 이규정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MZ 노조는 이념보다는 다분히 실리적이고 타협적인 노조 참여 세대”라며 “청년 정치의 중요도가 커질 수록 정당 내부에서도 기존 방식의 노조 투쟁에 휩쓸리기보다 실리를 좇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어 여야 협치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