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원장 취임사를 준비하다가 오래된 사진이 하나 생각났다. 1986년 12월 14일 44명의 연구원들이 원전 설계 기술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떠나는 길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그 안에 필자도 있다. 사진 가운데에는 ‘必(필) 설계기술자립’이라고 쓰인 큰 액자도 있다. 당시 한필순 원자력연구소장이 기술 자립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배워오라고 강조할 만큼 우리 모두는 절박했다.
그로부터 꼭 36년이 지난 지난달 14일 필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제22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25세에 기술전수단의 일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청년 연구원이 61세에 교수직을 놓고 전 직장으로 돌아왔다. 청년 연구원 시절 7년간 한빛 3·4호기 원전 설계에 참여했다. 그 후 잠시 유학을 갔다 돌아와 7년간 원자로 설계 코드를 개발하다가 대학으로 떠났다. 18년간의 교수직은 필자에게 학문의 심화뿐 아니라 원자력계 제반 문제를 폭넓게 볼 수 있는 기회였다. 36년 전 사진 속 날짜와 새로운 출발일이 같은 것은 이런 경험을 연구원 경영에 잘 활용하라는 뜻이리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자력은 지난 40여 년간 우리나라 전체 전력의 3분의 1을 싼값에 공급하며 급속한 경제발전의 추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기간 우리나라의 원전 설계와 설비 제작 능력은 완전히 독립을 이루고, 한국형 원전 ‘APR1400’, 소형원자로 ‘스마트(SMART)’, 소형모듈원전(SMR)을 독자 개발하고 수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난 5년간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산업은 퇴행했고 미래지향적인 원자력 연구개발은 억제됐다.
다행히 새 정부의 원자력 활성화 정책은 에너지 안보와 탄소 중립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 인식 증대와 더불어 원자력 연구개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증폭된 전 세계적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원자력은 발전 원가 중 수입 연료비 비중이 10%도 안 되는 준(準)국산 에너지다. 국제적인 에너지 가격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기요금의 반도 안 되는 발전 원가로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한다.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량을 늘려야 한다.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대전제는 안전성 확보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보다 더욱 안전한 선진 원자로 개발이 필자가 새 원장으로서 가장 중점을 둘 연구 분야다.
연구개발의 성공은 MZ세대(1980~2000년대생)를 다수 포함하는 연구진의 열정적인 참여로 가능하다. 상사의 지시에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묻는다는 MZ세대를 풍자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당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3요’는 그들이 중시하는 이성과 공정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어느덧 우리 사회의 중추로 부상한 MZ세대에 원자력이 ‘이성과 공정의 에너지원’이기를 기대한다. 오래된 사진 속 애국심으로 타오른 청년들의 눈빛과 새로운 분위기가 MZ세대 연구원들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부싯돌이 되기 바란다.